베이브 루스가 뉴욕 양아치들을 대표하는 선수라면 같은 리그 같은 지구에 속한 적대적 동반자인 보스톤 레드삭스를 상징하는 선수는 테드 윌리암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타자나 타격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윌리암스는 2004년 보스톤이 월드시리즈에서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난 것과 한국프로야구를 휩쓴 병풍 등으로 자주 언론이나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락 내리락했습니다.
테드 윌리암스는 1918년 8월 30일 노장 프로야구선수들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어하는 따뜻한 지방인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민감한 시기인 10대 때에 전세계를 암흑으로 몰고간 대공황은 윌리암스가 용가리통뼈도 아닌 이상 그 격렬한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이었고, 빈부격차가 격심해지면 해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도를 아십니까?]이듯이 그의 어머니는 종교에 빠져있었기에, 윌리암스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또한 물질적으로도 빈곤한 생활 속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야구밖에 없었습니다.
큰 키에 비해서 말라깽이였기에 전혀 야구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윌리암스였지만, 1936년 마이너리그팀인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 계약하면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메이저리그를 향한 그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당시 윌리암스의 소원은 거리를 걸을 때에 사람들이 [사상 최고의 타자 윌리암스다]고 소곤거리는 것이었고, 또한 그 꿈을 위해서 오로지 야구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퍼시픽코스트리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던 윌리암스는 보스톤 레드삭스의 당시 스카우터였던 에디 콜린스의 눈에 띄었고, 1938년 보스톤에 스카우트되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데뷔를 기대했지만, 스프링캠프에서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마이너리그인 미네아폴리스 밀러스행을 지시받았습니다. 윌리암스로서는 마이너리그로 강등된 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습니다. 미네아폴리스에는 일찍이 강타자로서 이름 높았던 로저스 혼스비가 감독으로 있었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윌리암스의 기량은 일취월장할 수 있었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서 타율 0.366, 43홈런, 142타점을 기록하면서 타격 3관왕에 오르면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습니다.
1939년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되었지만, 직선적인 성격의 윌리암스는 조 크로닌감독과 선수들로부터 환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실력밖에 믿을 것이 없었고, 또한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이 펜웨이파크의 외야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함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첫해에 삐끗할 경우 아직 뚜렷한 경력이 없는 데다가 감독과 고참들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던 테드 윌리암스였기에 마이너리그에서 평생 썩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기대와 불안 속에 맞이한 시즌이 끝났을 때에 테드 윌리암스가 거머쥔 성적표에는 타율 0.327, 31홈런(3위), 145타점으로 타점왕까지 차지하면서 홈런왕(35개)에 오르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던 지미 폭스 등을 이어서 보스톤을 대표할 선수로, 또한 뉴욕 양아치들의 조 디마지오와 함께 메이저리그를 이끌 선수로서 주목을 받게되었습니다.

테드 윌리암스라는 이름을 메이저리그의 한페이지에 남기게 된 1941년에는 개막직전에 당한 부상으로 불운한 출발을 보였습니다. 주루는 힘들었지만, 타격은 가능했기에 대타요원으로서 경기에 출장하다가 5월말이 되어서 펜웨이파크의 좌익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부상으로 벤치를 지키는 시간들이 많았기에 마음껏 경기에 뛰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던 근육들은 일거에 폭발하였고, 또한 근육들의 분노를 멈출 수 있는 소화기가 없었기에 공격 전부분에 걸쳐서 1위를 향해서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습니다. 1940년에 이어서 2번째로 참가한 올스타전은 테드 윌리암스라는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음을 알린 경기였습니다.
7월 8일 디트로이트의 홈구장인 브릭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별들의 전쟁은 9회말이 시작될 때까지 내셔널리그가 5:3으로 아메리칸리그에 앞서면서 전년도에 이어서 2년 연속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운드에는 시카고 컵스의 클라드 파소. 단 1이닝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방심한 탓인지 1사 주자 만루라는 역전의 찬스가 아메리칸리그에게 주어지고 타석에는 당시 연속게임 안타행진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던 조 디마지오.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던 양아치들을 대표하고 있던 조 디마지오로 언제나 주인공역할이 주어졌지만, 열광적인 성원 속에 등장한 디마지오가 친 타구는 유격수 땅볼. 가까스로 조 디마지오가 1루에서는 세이프가 되면서 5:4 한점차이에 2사 주자 1, 3루의 상황에 등장한 타자가 바로 테드 윌리암스. 윌리암스는 바소의 초구를 강타했고, 볼은 우익수 키를 훌쩍 넘어서 홈런이 되면서 올스타경기 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면서 테드 윌리암스는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팬들의 뇌리에 각인시켰습니다.
올스타전 이후에도 테드 윌리암스의 불붙은 방망이는 식을 줄을 몰랐고, 9월 중순에는 타율 0.413를 기록하면서 1930년 뉴욕 자이언츠의 빌 테리를 끝으로 누구도 기록하지 못했던 타율 4할을 가뿐히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슬럼프에 빠지면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와 더블헤더로 열리는 최종전을 앞둔 시점에는 타율 0.39955로 반올림해서 가까스로 4할에 턱걸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더블헤더로 열리는 2경기에서도 부진할 경우 타율 4할도 물거품이 되기에 크로닌감독은 윌리암스를 더블헤더에 출장시키지 않을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윌리암스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기록따위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팬들을 위해서, 또한 타격에 대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출장을 강행했습니다. 어쩌면 테드 윌리암스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먼나라에서 자신이 기록을 위해서 출장하지 않고 만든 4할이 한번도 아닌 2번이나 악용되는 것을 .... 아마도 자신을 왕으로 착각한 리씨의 사사오입과 [욕 먹는건 한때고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말로 부정한 짓거리가 당연함으로 포장되는 그 나라의 야구판을 에드가 케이시처럼 꿈에서 봤기 때문에 4할을 못쳐도 후세에 자신의 이름이 악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블헤더로 열린 전타석에 출전해서 윌리암스는 8타수 6안타를 몰아치면서 타율 0.406를 기록하면서 기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부 끝에 이루어낸 4할대의 타율과 37홈런, 120타점, 출루율 0.551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5타점차이로 타점왕을 조 디마지오가 차지하면서 아깝게도 타격 3관왕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4할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저평가되는 기록이 0.551라는 출루율이었습니다. 이 출루율은 2002년 배리 본즈에 의해서 깨지기 전까지 메이저리그의 최고봉 중의 하나였습니다. 윌리암스가 뛰어난 점은 높은 타율에도 있지만, 매시즌 100개정도의 볼넷을 얻어내는 선구안이었습니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찌라시들과의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에 시즌 MVP는 양아치들의 조 디마지오가 차지하였습니다. 찌라시들은 어느 나라던지 어느 시대던지 양아치들을 좋아한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1942년 테드 윌리암스는 타율 0.356, 36홈런, 137타점을 기록하면서 전년도에 아깝게 놓쳤던 타격 3관왕에 등극하지만, 시즌 MVP는 타율 0.322, 18홈런, 103타점을 기록한 양아치들의 조 골든이 차지하면서 메이저리그는 양아치들을 중심으로 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찌라시들 스스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전쟁터로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전쟁이 없었다면 베이브 루스의 홈런기록은 윌리암스에 의해서 깨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공백의 3년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생명이 그 종지부를 찍었지만, 운 좋게도 그는 살아 돌아와서 1946년에는 익숙한 펜웨이파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펜웨이파크를 바라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년동안 야구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있었던 테드 윌리암스는 맹타를 휘두르면서 팀을 이끌었습니다. 6월 9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친 153m짜리 홈런은 장외홈런을 제외하고 펜웨이파크에서 기록된 최장거리 홈런으로서 지금도 빨간색 등받이로 테드 윌리암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즌이 끝났을 때에는 타율 0.342, 38홈런, 123타점 등으로 공격 전부분에서 2위를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리그 MVP를 수상했고 팀도 1918년 우승 이후 28년만에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였습니다. 월드시리즈의 상대인 세인트루이스 카지널스에는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스탠 뮤지얼이 있었기에 두명의 천재타자들의 대결로도 관심을 모았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테드 윌리암스는 시즌 막바지에 당한 부상의 여파로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월드시리즈에서 25타수 5안타 1타점밖에 올리지 못했고, 스탠 뮤지얼도 27타수 6안타로 부진하면서 월드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지는 격전이 되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스포츠맨스 파크2에서 열린 운명의 7차전은 8회초 보스톤이 2점을 따라가면서 3:3 동점으로 승부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8회말 2사 1루가 되었을 때에는 연장승부가 조심스럽게 말해질 때에 해리 워커의 좌중간 안타가 터져나왔고, 2사였기에 딱하는 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 에노스 슬로터는 브레이크가 고장난듯이 멈추지 않고 질주하였습니다. 2루를 거쳐서 3루에서 다시 홈까지 파고드는 슬로터의 질주에 중계플레이를 하고 있던 보스톤의 유격수였던 조니 페스키는 당황해서 홈에 던진 볼은 정확하게 송구되지 못하고 3루쪽으로 쏠리면서 결승점을 얻어냈고, 어이없는 득점을 준 보스톤은 무기력하게 9회를 끝내면서 세인트루이스의 우승이 결정되었습니다. 후에 조니 페스키는 노마 가르시아파라와 같은 강한 어깨를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당시 짧은 안타로 홈까지 달린 슬로터의 미친 짓(?)에 페스키가 당황해서 제대로 공을 잡지 않고 던져서 송구가 정확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1947년에도 타율 0.343, 32홈런, 114타점으로 자신의 두번째 타격 3관왕에 오르지만, 타율 0.315, 20홈런, 97타점을 올린 조 디마지오가 시즌 MVP를 차지하였습니다. 1948년에는 타율 0.369로 타격왕에 오르면서 팀을 이끌었지만, 클리블랜드와의 1위 결정전에서 아쉽게도 패하면서 월드시리즈 진출로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949년에는 43홈런과 159타점을 기록하면서 2관왕과 두번째 시즌 MVP에 등극하였지만, 타율에서 0.3427로 0.3429를 기록한 디트로이트의 조지 켈에게 밀려서 3번째 타격부분 3관왕에는 실패하였습니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테드 윌리암스였기에 크고 작은 부상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1950년 올스타전에서 펜스에 부디치면서 무릎부상과 1954년과 1955년에는 쇄골 골절로 장기간 결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테드 윌리암스가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노력도 있지만, 동체시력(움직이는 물체를 인지 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테드 윌리암스는 투수가 던진 볼에 찍힌 리그 회장의 사인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분당 78회전하는 레코드의 라벨에 써여져 있는 글자를 읽은 적도 있었기에, 투수가 던진 볼의 회전 등으로 구질을 간파했다는 말도 완전히 거짓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동체시력은 야구선수로서 테드 윌리암스에게 타격의 신이라는 호칭을 주었지만, 이 재능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시 전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동체시력을 가진 테드 윌리암스는 폭격기의 조종사가 되어서 연일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의 하늘을 날을 수밖에 없었고, 가중한 비행으로 폐렴에 걸리는 등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약 2년간을 보내고 1953년 후반 운 좋게도 살아서 다시 한번 펜웨이파크에 설 수 있었습니다.
1957년과 1958년 2년연속 타격왕에 오르면서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지만, 흐르는 세월과 부상 등으로 1959년 데뷔이래로 처음으로 2할대 타율을 기록하면서 펜웨이파크에서 퇴장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렸습니다. 1960년 시즌 종반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발표하였고, 10월 2일 뉴욕 양아치들과의 최종전의 마지막 타석에서 후회없는 선수생활을 자축하는 홈런을 치면서 메이저리거로서 활동한 19시즌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후, 보스톤의 마이너리그 감독을 거쳐서 1969년 워싱턴 세네터스(현 텍사스 레인저스)의 감독으로 메이저리그에 복귀하였지만,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1972년을 끝으로 텍사스의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테드 윌리암스의 메이저리그 통산성적
1999년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시구자로서 등장하여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테드 윌리암스는 2002년 7월 5일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 후 테드 윌리암스의 유해를 둘러싼 소동을 보면서 끝없는 생명에 대한 인간의 욕심과 돈벌이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태평양 건너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사사오입의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고, 또한 때려잡자 빨갱이에 의외로 이용당하지 않았지만, 2004년 한국프로야구에 몰아친 병풍과 함께 군대가자에 예가 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군사정권이 그를 때려잡자 빨갱이에 이용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그가 활동한 보스톤이 빨간양말이었기에 그를 그냥 둔 것으로 생각됩니다. 윌리암스의 야구인생은 국가라는 집단이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재능이 국가라는 집단에 의해서 왜곡되고 실현되는지를 지금의 이라크에서도, 그리고 이 작은 땅덩어리의 여기저기에서 벌어진 기억들로 알 수 있습니다. 테드 윌리암스의 시체는 영구보존되어야만 합니다. 전쟁광들의 바램처럼 국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개인이 아닌 광기어린 전쟁광들로부터 살아남은 자로서, 그리고 개인의 재능이 국가의 희생물이 된 증거로서 .... ....
평화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자
병사는 결단을 내리고
영웅적으로 전사했네.
전쟁은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자기의 병사가 죽어버린 것이
아무래도 너무 때 이르게 생각되어
황제에게는 유감이었네
무덤들 위로 여름이 오고
병사는 이미 잠들었는데
어느날 밤 의무부대가
이곳에 나타났네
의무부대 군인들은
묘지로 나가
신성한 군용삽으로
전사한 병사를 파내었네.
군의관은 그 병사를, 아니
그 병사의 아직 남아 있는 시체를 자세히 보고
그가 갑종합격자임을 알아내었네.
그리고 슬그머니 위험을 피해 도망쳤네.
그들은 곧장 그 병사를 데리고 갔네.
밤은 푸르고 아름다웠네.
철모를 쓰지 않았더라면
고향의 별들이 보였을 것이네.
그들은 병사의 썩은 몸뚱이에
독한 화주를 뿌렸네.
병사의 팔에는 두 사람의 수녀와
반쯤 벌거벗은 계집을 매달아 주었네
병사한테서 지독하게 썩은 냄새가 풍겨 나오므로
목사 한 사람이 앞장서 절뚝거리며
병사한테서 냄새가 풍기지 않도록
그의 몸 위로 향로를 흔들어대네.
앞에서는 악대가 쿵작작
신나는 행진곡을 연주하네.
병사는 그가 배운대로
엉덩이 높이까지 다리를 곧게 올려 내딛었네.
형제처럼 병사를 팔로 감싸고
두 사람의 위생병이 함께 걷고 있네.
그렇지 않으면 병사는 아마 진창속으로 쓰러져 버릴 터이니
그랬다가는 큰일이네.
그들은 병사의 수의에다
흑, 백, 홍색을 칠하여
그것을 병사의 앞에 쳐들었네.
색깔 때문에 온갖 더러운 것이 보이지 않았네.
가슴이 떡 벌어진 신사 한 사람이
연미복을 입고 앞장서 걸었네.
독일의 사나이로서 이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똑똑히 알고 있었네.
그들은 쿵작작거리며
어두운 가로를 따라 행진했네.
폭풍 속의 눈송이처럼
병사도 비틀거리며 함께 행진했네.
고양이와 개들이 울고 짖고
들판의 쥐들도 사납게 찍찍거리네.
그것들도 프랑스편이 되고 싶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것은 치욕이므로.
그들이 마을을 지나갈 때면
그곳의 여자들이 모두 나왔네.
나무들이 허리를 굽히고, 만월이 비치고
모두가 만세를 외쳤네
쿵작거리는 소리와 환송의 외침!
여자와 개와 목사!
그리고 그 한가운데 죽은 병사가
취한 원숭이 처럼 끼여 있네.
그들이 마을을 지나갈 때면
아무도 이 병사를 볼 수 없었네.
쿵작작거리고 만세를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로싸고 춤추며 소리쳤으므로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네.
오로지 하늘에서만 그를 내려다 볼 수 있었으나
하늘에는 별들만이 반짝이고 있었네.
별들이 언제나 떠 있는 것이 아니네.
이제 아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오네.
그러나 병사는 그가 배운 대로
영웅적인 죽음을 행하여 행진해 가네.
브레히트의 [죽은 병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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