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부터 2005년까지 안되는 집안의 전형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였다. 그런 타이거스가 2006년에는 대역전극을 당하면서 중부지구 수위를 기록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나섰고,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2007년에도 강력한 우승 후보 중의 하나로 거론되었지만, 마운드가 무너지면서 지구 2위에 그쳤지만, 오프시즌에 미겔 카브레라와 돈트렐 윌리스 등을 영입하는 등 타이거스가 중부지구를 넘어서 아메리칸리그의 강자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여하튼 1901년 아메리칸리그의 창단 멤버 중에 하나인 타이거스이지만, 그 역사는 아메리칸리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타이거스의 전신은 1881년 주류 판매를 놓고서, 신경질을 부린 신시네티를 대신해서 내셔널 리그에 가입한 디트로이트 울버린스이다. 1881년 이래로 중하위권을 기록하던 울버린스는 1885년을 끝으로 퇴출된 버팔로 바이슨즈의 주력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일약 상위권으로 도약하였다. 그리고, 1887년에는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현 컵스), 필라델피아 퀘이커스(현 필리스)와 치열한 3파전을 벌인 끝에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아메리칸어소시에이션에서 우승한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 월드시리즈를 가지기도 하였다.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어소시에이션의 월드시리즈는 1882년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현 컵스)와 신시네티 레드 스타킹스(현 레즈)간에 치러진 2차례의 대항전이 그 시작으로, 1884년부터 정기적으로 양대 리그의 우승팀 간에 치루어지는 월드시리즈가 행해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7전 4승제가 아니라, 매년 양 리그의 우승팀 간의 협약에 의해서 경기수가 결정된 이벤트적인 성격이 강했다. 결국, 놀면 뭐 하나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1887년에는 무려 15경기나 펼쳐졌고, 울버린스가 10승 5패를 기록하였다.
1888년에 리그 5위로 추락한 울버린스는 내셔널리그를 탈퇴한 후에, 독립된 마이너 리그인 웨스턴 리그에 가입하면서, 디트로이트 울버린스라는 이름은 메이저리그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01년에 웨스턴 리그가 아메리칸리그로 확대되면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에 복귀하였다. 타이거스라는 이름은 청색과 황색 줄무늬 양말을 신은 울버린스의 선수들의 모습에서 연상된 애칭으로 어느 순간부터 울버린스를 밀어내고 팀 명칭이 되었다 - 타이거스라는 명칭을 당시 감독이던 윌리암 스탈링스가 붙였다는 설과 신문기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데, 진실은 담배 피우는 호랑이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엉덩이에 뿔난 태국산 망아지
타이거스는 1901년 4월 25일 밀워키 브루어스(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개막전에서 4 : 13으로 리드당하고 있던 9회초에 대거 10득점하는 대역전극을 연출하면서 기분 좋게 출발하였지만, 시즌이 끝났을 때에는 3위에 그쳤다. 그 후로도 타이거스는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브 루스 이전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인 타이 콥이 타이거스의 일원이 된 것은 1905년이었다. 타이거스는 마이너리그인 사우스 애틀란틱의 오거스타에서 활약하고 있던 타이 콥을 투수 1명과 700달러의 현금을 주고서 영입하였고, 그는 8월 30일 뉴욕 하이랜더스(현 양키스)와의 경기를 통해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다.
데드볼시대를 대표하는 대타자로 타율왕의 대명사로 불리는 타이 콥이지만, [야구 역사상 최대의 오점]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기량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다혈질쟁이에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인종 차별 주의자가 바로 타이 콥이었다. 약간 검은 피부를 가진 베이브 루스를 반껌둥이 - 이것 때문에 베이브 루스가 흑인과의 혼혈이라는 설도 생겼지만 - 라고 조롱하기도 하였고, 상대 수비수가 다치던 말던 날카롭게 간 스파이크를 앞세워서 슬라이딩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자신에게 야유하는 관중을 두들켜 패는 등 난폭한 폭력은 일상다반사로 행한 최악의 선수였다. 타이 콥이 은퇴했을 때에 93개의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위대한 선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격 자체는 실격이었다.
타이거스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1906년을 끝으로 빌 아무르를 짜르고, 승부욕이 강한 휴이 제닝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하였고, 타이 콥은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출전 기회를 잡았다. 당시의 감독들이 선수들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통솔하였던 것에 비해서, 휴이 제닝스는 "화를 내는 것은 에너지와 시간 낭비에 불과다. 화낼 시간에 선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격려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옆집 아저씨와 같은 부드러움과 세심함으로 팀을 이끌었다. 처음으로 풀시즌을 보낸 1907년에 타이 콥은 타율 0.350, 119타점, 49도루로 타격 3관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펼치면서, 기존의 샘 크로포드와 함께 팀 타선을 이끌었다. 또한, 투수진에서도 에드 킬리안과 빌 도노반이 각각 25승씩을 거두는 활약 등으로 타이거스는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를 제패하였다.
월드시리즈의 상대는 당시 최강팀으로, 내셔널 리그에서 107승을 거둔 시카고 컵스였다. 1차전에서 9회초까지 3 : 1로 타이거스가 리드를 지키면서, 컵스로서는 작년에 월드시리즈에서 물방망이 화이트삭스에게 당한 악몽이 재현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타이거스는 포수인 보스 슈미트가 결정적인 스트라이크 낫아웃을 범하는 실책 등으로 9회말에 동점을 허용하였고, 연장 12회까지 가는 혈전을 펼쳤지만, 일몰로 무승부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 미숙으로 다잡은 승리를 놓친 타이거스는 2차전부터 내리 4연패를 기록하였다.
1908년에도 타이거스는 타율왕과 타점왕을 차지한 타이 콥과 홈런왕을 차지한 샘 크로포드를 앞세워서 클리블랜드 냅스(현 인디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치열한 삼파전 끝에 리그 2연패를 달성하였다. 공교롭게도 월드시리즈의 상대는 전년도에 이어서 시카고 컵스였다. 타이거스는 복수에 불탔지만, 경기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1차전에서 에드 킬리안과 24승을 거둔 신예 에드 서머스를 투입하는 총력전을 펼쳤지만, 6 : 5로 1점 리드하고 있던 9회초에 대거 5실점하면서 6 : 10 역전패를 당하였다. 2차전에서도 패배를 기록한 타이거스는 3차전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기록하면서 월드시리즈 첫승을 올렸지만, 컵스의 모데카이 브라운과 오벌 오버롤에게 차례로 완봉패를 당하면서, 1승 4패로 2번째 월드시리즈 도전도 실패로 막을 내렸다.
1909년에도 홈런왕까지 차지하는 등 타격 전관왕에 오른 타이 콥과 샘 크로포드의 창에 29승의 조지 멀린 등의 방패를 앞세운 타이거스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의 추격을 뿌리치고 3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를 제패하였다. 타이 콥과 샘 크로포드는 타이거스를 대표하는 타자로서 팀의 중심이었지만, 양키스의 전설적인 콤보인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과 마찬가지로 앙숙지간이었다. 하긴 인간 말종인 타이 콥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 드물었지만 .... ....
월드시리즈의 상대는 무려 110승을 올린 피츠버그 파이러츠로, 그 중심에는 호너스 와그너가 있었다. 호너스 와그너와 타이 콥이라는 양대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들의 진검 승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타이거스와 파이러츠의 월드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일전일퇴를 거듭하는 격전을 펼쳤지만, 호너스 와그너(타율 0.333)와 타이 콥(타율 0.231)의 맞대결은 호너스 와그너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쌍포인 타이 콥과 샘 크로포드의 부진 등으로 타이거스는 3승 4패로 무릎을 꿇었고, 3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고서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최초의 구단이 되었다.
타이 콥은 1907년부터 1915년까지 9년 연속으로 타율왕을 차지하였다. 1916년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트리스 스피커가 타율왕을 차지하면서, 타이 콥의 10년 연속 타율왕에 급제동을 걸었지만, 타이 콥은 1917년부터 1919년까지 3년 연속으로 타율왕을 차지하는 등 통산 12차례나 타율왕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한다면, 1910년 타율왕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냅 라조이라고 할 수 있다.
1910년에 찰머스 자동차의 오너로서 야구광이었던 휴 찰머스는 양대 리그를 통틀어서 최고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최신형 자동차를 부상품으로 내걸었고, 이것이 타격왕 만들어 주기 - 한국프로야구의 모모 감독들의 뻔뻔스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 의 원인이 되었다. 타이 콥과 냅 라조이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타율왕을 놓고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냅 라조이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시즌 최종전인 더블헤더 경기를 앞둔 시점에서 타이 콥은 타율 0.383로 시즌을 마감하였고, 냅 라조이는 0.376를 기록하고 있었다. 사실상 타이 콥의 타율왕에 등극하는 것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한인 타이 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였고, 야구계의 수치인 타이 콥이 부상품으로 자동차까지 차지하는 꼬라지를 브라운스의 감독인 잭 오코너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게다가 당시 브라운스는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리그 최하위가 결정된 상황이었다. 잭 오코너는 3루수인 로이 하트젤에게 수비 위치를 깊게 잡으라고 지시하였고, 로이 하트젤 역시 타이 콥을 싫어한 관계로,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냅 라조이는 브라운스와의 더블헤더에서 7개의 3루 방면의 번트안타를 포함해서 8타수 8안타를 기록하면서, 타이 콥에게 4모 차이로 앞서면서 극적인 역전극으로 타율왕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브라운스가 냅 라조이에게 번트 안타를 만들어 주었기에, 결국 타이 콥과 냅 라조이에게 각각 최신형 자동차를 한대씩 주는 것으로 논란을 봉합하다. 그후 타이 콥의 9년연속 타율왕이라는 기록을 위해서 공동 1위를 한 것으로 하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아마도 이 논란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912년에 새로운 홈구장인 - 후에 타이거스타디움이라고 불리게 되지만, 개장 당시에는 구단주의 이름을 따서 - 네빈 필드가 개장하였지만, 타이거스는 중하위권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1915년에 타이 콥이 20세기 들어서 한시즌 최다인 96도루 - 1962년에 다저스의 모리 윌스가 104개의 도루를 기록할 때까지 47년간 전인미답의 기록으로 남아 있었고, 지금은 1982년에 어슬레틱스의 리키 헨더슨이 기록한 130도루이고, 19세기까지 포함하면 1887년에 휴 니콜이 기록한 138도루가 한시즌 최다도루 기록이다 - 등을 기록하면서, 타이거스는 100승 54패라는 호성적을 거두지만, 101승 3무 50패를 기록한 보스톤 레드삭스라는 존재로 인해 리그 2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타이 콥은 24년간 메이저리거로 활동하면서 갖가지 기록들을 달성하였지만,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 하나도 끼지 못하였다.
야구 역사상 최악의 날
1912년 5월 15일에 열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뉴욕 하이랜더스(현 양키스)와의 경기는 야구 역사상 최악의 날 중의 하나로 말해지고 있다. 그 날따라 무슨 마음인지 한명의 관중이 성질머리 나쁜 타이 콥에게 끊임없이 야유를 보냈고, 타이 콥은 서서히 열받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공수교대로 자신의 수비위치인 레프트로 향하던 도중에 다시 한번 야유가 날아오자 그는 그대로 담장을 넘어서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관중에게 달려갔다. 생각하지도 못한 타이 콥의 행동에 관중들과 선수들이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타이 콥은 자신에게 야유를 퍼붓던 관중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타이 콥의 폭풍과 같은 주먹질에 관중은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기절하였고,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야유를 한 관중은 하체를 움직일 수 없는 부자유스러운 사람이었다. 즉,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샌디백을 때리듯이 구타한 타이 콥의 행위에 관중들은 콥을 흥분하였고, 그를 에워샀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던 타이 콥은 언제라도 자신을 둘러싼 관중들과도 싸울 태세를 보이면서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관중들의 계속되는 비난에 타이 콥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다리 하나가 없는 병신도 나에게 시비를 걸면 이 꼴이 된다. 덤빌려면 덤벼라!!"면서 관중을 향해 도발하였다.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타이 콥의 폭력행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심판은 퇴장 처분을 내리면서 경기는 어쨋든 속행될 수 있었고, 타이거스가 하이랜더스에 8 : 4로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 아메리칸리그의 회장인 밴 존슨은 타이 콥에게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리면서, 상황은 더욱 더 꼬여만 갔다. 타이 콥에 대해서는 팀동료들도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내려진 처분이 지나치게 가혹하였고, 또한 타이거스 퇴출론과 같은 강경 책임론이 나오는 등 자신들의 일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선수들은 5월 17일의 경기를 끝으로 파업을 일으켰다.
5월 18일 필라델피아에서 어슬레틱스와의 경기가 예정된 타이거스로서는, 야구장에 선수들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 경기가 무산된 책임으로 벌금 5천 달러를 낼 수밖에 없는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휴이 제닝스 감독은 포수와 1루수는 코치로 대체하는 것으로 하지만, 나머지 포지션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휴이 제닝스는 코치들과 상의 한 끝에 알바를 채용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필라델피아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알바 모집에 나섰다.
대학교에서 투수를 하고 있던 앨런 트레버스에게 일당 25달러에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여기 저기에서 일당 10달러로 야구 알바들을 끌어모았다. 타이거스가 어중이 떠중이들을 모집해서 경기에 임한다는 소문은 필라델피아에 널리 퍼지면서, 두번 다시 없을 진풍경을 구경하러 무려 1만 5천명 이상이 야구장을 찾았다. 예상대로 타이거스의 선수들은 한명도 야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역사상 최악의 외인구단은 현실화되었다.
에디 콜린스, 프랭크 베이커 등의 강타선을 자랑하던 어슬레틱스는 알바 투수인 앨런 트레버스를 두들겼고, 타이거스는 2 : 24로 패배를 기록하였다. 어슬레틱스가 26안타를 친 것에 비해서 타이거스는 단 4안타의 빈공 - 그것도 2안타는 코치인 조 석덴과 디콘 맥과이어가 기록하였다. 이 말도 안되는 최악의 외인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아메리칸 리그는 5월 20일에 열릴 예정이던 타이거스와 어슬레틱스의 경기를 취소하고, 리그 회장인 밴 존슨과 타이거스의 구단주인 프랭크 네빈 등이 필라델피아로 달려가서 선수들을 설득하였다.
밴 존슨 등은 타이거스의 퇴출 등과 같은 강경책은 절대로 없다는 확약을 선수들에게 하면서, 파업을 중지시킬 수 있었다. 5월 21일 워싱턴 세네터스(현 트윈스)와의 경기부터 다시 진정한 메이저리그끼리의 경기가 가까스로 재개될 수 있었다. 파업으로 끈끈한 동료애를 확인한 타이거스는 전설적인 대투수인 월터 존슨이 나온 세네터스에게 2 : 0 승리를 거두면서 기분좋게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숙소에서 타이거스의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타이거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밴 존슨의 축전이 아닌 파업에 참가한 선수 일인당 1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통지였다. 그리고, 파업 등의 원인을 제공한 타이 콥에게는 10경기 출장정지와 50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마침내 월드시리즈를 제패
1907년부터 감독 자리를 지켜온 휴이 제닝스가 1920년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1921년부터 타이 콥이 감독겸 선수로 팀을 이끌었지만, 타이거스는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이 콥은 1922년에 타율 0.401를 기록하면서 20세기 들어서 타율 4할을 3번이나 기록한 최초의 타자가 되었다. 1926년 시즌이 끝나고 연말에 타이거스의 구단주인 프랭크 네빈이 타이 콥과 계약연장을 할 생각이 없음을 밝히자마자, 1925년까지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더치 레오나드가 "타이 콥과 인디언스의 트리스 스피커, 조 우드 등이 돈을 걸고 승부조작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타이 콥을 둘러싼 파문이 커져만 갔다. 1927년 1월에 블랙삭스 스캔들로 조 잭슨 등을 야구계에서 영구 추방했던 랜디스 커미셔너는 서둘러서 "타이 콥과 트리스 스피커가 관련된 의혹에 대해서 조사했지만, 승부조작을 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진화에 나서면서, 그를 둘러싼 승부 조작 파문은 유야무야되었다. 타이 콥은 타이거스를 떠나 어슬레틱스로 이적하였다.
타이 콥과 트리스 스피커 등이 관련된 승부 조작 혐의에 대해서는 지금도 설왕설래하고 있다. 블랙삭스 스캔들로 위기에 빠졌던 메이저리그로서는 또 한번의 홍역을 치를 자신이 없었을 뿐이지 타이 콥 등이 사실은 유죄라는 시각도 있고, 타이 콥과 결별하기 위한 타이거스의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다.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겠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실제로 승부조작이 행해졌지만, 베이브 루스의 등장 등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던 메이저리그로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닌지 싶다. 타이 콥 이후 조지 모리어티, 버키 해리스 등이 타이거스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성적은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1909년을 끝으로 리그 우승은 커녕 우승 경쟁에서도 탈락한 타이거스는 1934년 새로운 감독으로 베이브 루스를 영입하려고 했지만, 양키스와의 협상이 결렬되었고, 결국 어슬레틱스의 미키 코크레인을 영입하였다. 베이브 루스가 대통령보다 많은 8만달러의 연봉을 받으면서 야구 재벌이 화제가 되던 시기에 타이거스는 코크레인의 몸값으로 어슬레틱스에 무려 10만달러를 지불하였다. 드디어 노쇠한 호랑이가 치매에 걸렸다는 비아냥을 타이거스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31세의 나이에 미키 코크레인은 감독겸 선수로 팀 재건의 중임을 맡았다.
미키 코크레인에게 10만달러를 투자한 타이거스의 선택이 옳았음은 1934년에 바로 나타났다. 전년도 리그 5위였던 타이거스는 101승을 거두면서 25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메이저리그 기록인 16연승을 포함해서 24승을 거둔 신예 스쿨보이 로우와 22승의 토미 브리지스가 마운드를 이끌었지만, 타이거스의 진정한 힘은 타선에 있었다. 시즌 최다 안타인 214안타를 기록한 찰리 게링거를 필두로, 30경기 연속안타를 친 구스 고슬린, 서서히 자신의 장타력을 선보이기 시작한 행크 그린버그 등 팀타율 0.300을 기록할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였다.
월드시리즈의 상대는 메이저리그판 [주유소 습격단 Gas house gang] - 경기가 끝났을 때에 선수 전원의 유니폼이 흙투성이가 될 정도로 격렬한 허슬 플레이를 펼쳐서 당시 악명을 떨치고 있던 갱단에 빗댄 별명을 얻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타이거스는 49승을 합작한 딘 형제(형인 디지 딘이 30승, 동생인 폴 딘은 19승)가 이끄는 카디널스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면서, 3승 2패로 앞서면서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눈 앞에 두었다. 하지만, 6차전에서 폴 딘에게 완투패를 당한데 이어서, 7차전에서는 디지 딘에게 완봉패를 당하면서 타이거스의 꿈은 딘 형제에 의해서 일장춘몽이 되었다.
3G(찰리 게링거, 행크 그린버그, 구스 고슬린)을 앞세운 타이거스는 1935년에도 양키스의 맹렬한 추격전을 따돌리고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일찍이 1907년과 1908년의 월드시리즈에서 자신들을 물먹였던 시카고 컵스였다. 일전일퇴를 거듭하면서 5차전이 끝났을 때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타이거스는 3승 2패로 시리즈 우승까지는 단 1승만을 남겨두었다. 운명의 6차전에서 타이거스와 컵스는 동점과 역전, 재역전을 거듭하는 접전 속에서 8회까지 3 : 3 동점으로 이루고 있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7차전까지 갈 경우에 타이거스의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동요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미키 코크레인은 9회초에 21승을 기록한 에이스인 토미 브리지스를 투입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정규 이닝의 마지막인 9회말에 타이거스는 구스 고슬린의 끝내기 안타로 4 : 3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도 맛을 본 타이거스는 1936년에도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도전하였지만, 팀의 주포인 행크 그린버그가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거의 출전하지 못하면서, 양키스에 이은 리그 2위에 그쳤다. 행크 그린버그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1937년에는 3G의 한축인 구스 고슬린이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고, 어미 호랑이인 미키 코크레인이 5월 25일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범프 해들리의 빈볼이 얼굴에 맞으면서, 두개골 골절로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등 정상적으로 감독직을 수행할 수 없는 불운이 겹쳤다. 미키 코크레인에 이어서 델 베이커, 사이 퍼킨스 등이 타이거스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2년 연속으로 양키스에 이은 리그 2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에 미키 코크레인이 다시 지휘봉을 잡았지만, 예전과 같은 날카로움을 보이지 못하면서 시즌 도중에 은퇴하였고, 타이거스도 리그 4위로 추락하였다. 그 후, 미키 코크레인은 어슬레틱스의 코치와 스카우터 등을 거쳐서 타이거스의 부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오클라호마에 미키 코크레인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한 농부가 있었고, 자신의 아이에게 미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아이가 훗날 [역대 최고의 스위치 히터]라고 불리는 미키 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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