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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 블로그에서 잊을 수 없는 선수들 (60)에서 윌리 메이스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기에 함께 읽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오랫동안 꿈을 바라 본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닮는다


1964년 7월 24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외야수를 아버지로 둔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팀의 동료로서 스타 중의 스타인 한 선수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그 스타플레이어는 그 아이의 대부가 되었다.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2004년 4월 12일에 그 스타와 같은 팀의 유니폼을 입은 그 아이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통산 660번째 홈런을 기록하였고, 2006년에는 그 스타가 도달하지 못했던 베이브 루스를 넘어섰고, 2007년 8월 7일에는 메이저리그의 통산 최다 홈런인 행크 아론의 755홈런을 갱신하는 756번째로 공을 펜스 너머로 날려 버렸다. 그 아이의 이름은 배리 본즈이고, 그의 대부가 된 스타플레이어는 바로 윌리 메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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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역사상 최고의 수비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The Catch]로 유명한 윌리 메이스는 12번의 골드글러브와 각각 4번이나 홈런왕과 도루왕을 수상했을 정도로 공수주에서 가장 완벽한 선수로 손꼽히고 있다. 그가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을 때에 한번은 어떤 기자가 그에게 "지금까지 본 선수 중에서 최고의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물음에 윌리 메이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 자신이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 누구도 그의 답변을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황금의 사우스포라고 불린 샌디 쿠펙스가 "베이브 루스가 윌리 메이스보다 더 뛰어난 선수였다는 세간의 평가를 믿지 않는다. 베이브 루스는 야구계의 아놀드 파머와 같은 존재이지만, 윌리 메이스만큼 뛰어난 주루 능력을 보이지 않았고, 또한 그 만큼 뛰어난 수비를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윌리 메이스는 베이브 루스나 행크 아론 등으로 인해 야구계에서 오히려 가장 과소평가를 받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지금까지 단 4명밖에 없는 3,000안타와 500홈런을 행크 아론에게 간발의 차이로 뒤지면서 두 번째로 달성하였지만, 메이저리그 역대 최초로 300홈런과 300도루를 달성한 선수가 바로 윌리 메이스였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운동신경을 보인 윌리 메이스는 17세이던 1947년에 니그로리그의 버밍엄 블랙 베런스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직업 야구 선수로서의 길을 걸었다. 어린 나이에도 팀의 주전 외야수로 뛰어난 기량을 보였던 그는 1945년에 재키 로빈슨이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흑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메이저리그의 각 구단들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윌리 메이스는 1950년에 당시에는 뉴욕을 프랜차이즈로 두고 있던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사실 먼저 그를 주목했던 팀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늦게 흑인들을 받아들인 양키스와 레드삭스였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양키스의 구단 운영진들은 팀의 스카우터를 파견했지만, 남부출신으로 인종 차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그 스카우터는 흑인인 윌리 메이스가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입을 막기 위해서, 그 스카우터는 "윌리 메이스는 커브를 손도 대지 못 한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고, 결국 양키스는 그의 영입을 포기하였다.

또한, 당시 버밍엄에 마이너리그 팀을 가지고 있던 레드삭스는 윌리 메이스를 영입하는데 어떤 구단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그의 영입을 추진하기 위해서 파견한 스카우터도 윌리 메이스에 대해서 장래에 슈퍼스타가 될 선수라고 호평을 하였다. 하지만, 흑인을 혐오하던 당시 레드삭스의 감독인 조 크리닌의 강력한 반대와 보수적인 지역적 성향 등을 고려해서, 레드삭스도 윌리 메이스의 영입을 중도에 포기하였다. 만약 윌리 메이스가 양키스나 레드삭스에 입단하였다면, 미키 맨들 - 윌리 메이스나 테드 윌리엄스 - 윌리 메이스라는 역대 최강의 듀오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고, 메이저리그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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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자이언츠에 입단한 윌리 메이스는 1년간 마이너리그를 거친 후 1951년 5월 25일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독립리그와 마이너리그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그이지만, 메이저리그의 벽은 생각 이상으로 높아서, 12타수 0안타를 기록하는 등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계속된 부진에 자신감을 잃은 그는 감독인 레오 드로셔에게 마이너리그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사실 레오 드로셔가 전혀 안타를 치지 못하는 윌리 메이스를 계속해서 선발 출장시키고 있었던 것은 좋은 의미의 징크스와 관련이 있었다. 윌리 메이스가 안타를 치지 못한 3경기에서 자이언츠는 3연승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 드로셔로서는 연승이 멈춘 후에 부진한 윌리 메이스를 마이너리그로 강등시켜도 늦지는 않다고 판단하였다. 연승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구태여 변화를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기소침한 그에게 레오 드로셔는 "너는 안타를 치지 못하고 있지만, 팀은 이기고 있다. 아마도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자이언츠의 센터는 윌리 메이스 바로 너가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레오 드로셔의 신뢰에 힘을 얻은 윌리 메이스는 데뷔 이래로 4번째 경기인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리그 최강의 좌완투수인 워렌 스판으로부터 유일한 득점인 메이저리그 첫 안타로 홈런을 기록하였다. 공교롭게도 윌리 메이스가 첫 안타를 친 이 경기에서 자이언츠는 패배를 기록하면서 4연승 행진에 종지부를 찍었다.

힘겹게 데뷔 첫 안타를 친 윌리 메이스는 이후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시즌이 끝났을 때에는 타율 0.274, 20홈런, 68타점 등을 기록하면서 리그 신인왕을 차지하였다. 신인으로서 팀 내에서 바비 톰슨과 어빈 몬테에 이어서 3번째로 많은 홈런을 기록한 그에게 구단과 팬들의 기대는 대단했지만, 1952년에는 단 34경기에 출전한 후에 한국 전쟁으로 인해 군대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한그는 타율 0.345로 첫 개인 타이틀인 타격왕과 함께 41홈런, 110타점, 119득점 등 2년간의 공백을 무색하게 하는 맹활약으로 자이언츠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자신은 리그 MVP를 수상하였다.

그리고, 인디언스와의 월드시리즈 제1차전에서는 2 : 2 동점이던 8회초 무사 1, 2루의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머리 뒤로 넘어가는 타구를 역동작으로 잡아내는 [The Catch]라고 불리는 역사에 남을 호수비를 펼쳤고, 그의 수비로 위기를 넘긴 자이언츠는 연장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기세가 오른 자이언츠는 인디언스를 숨쉴 틈 없이 밀어붙이면서 4연승으로 월드시리즈를 제패하였다. 윌리 메이스가 [The Catch]는 물론이고, 12번이나 골드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을 펼친 배경에는 군대시절에 익힌 바스켓 캐치 덕분이었다. 바스켓 캐치란 마치 광주리로 공을 받듯이 글러브의 안쪽이 하늘을 향하도록 해서 포구하는 방법으로, 윌리 메이스의 전매특허였다.



단숨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스타가 된 그는 1955년에는 51홈런으로 첫 홈런왕에 올랐고, 1956년과 1957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2년 연속 30홈런 - 30도루를 달성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 자이언츠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한 후에도 1961년과 1962년에는 2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기록하였고, 1965년에는 자신의 캐리어 하이인 52홈런 등으로 두 번째로 리그 MVP를 수상하였다. 또한, 1959년부터 1966년까지 8년 연속 세 자리 수 타점을 올리는 등 야구장을 찾은 팬들에게 언제나 최고의 플레이를 선사하였다.

게다가,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캔들스틱 파크는 메이저리거들로부터 '최악의 구장'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강한 해풍으로 인해 홈런을 기록하기 어려운 구장 중에 하나였다. 역사에는 'if'가 없다지만, 윌리 메이스가 징병으로 인한 2년간의 공백과 캔들스틱 파크를 홈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베이브 루스의 통산 714홈런을 깬 첫 번째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이견은 없다.

22년간의 메이저리거로 활약하면서 20번이나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실력과 인기를 겸비했던 윌리 메이스도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었다. 36세이던 1967년부터 노쇠화를 보이기 시작한 그는 1972년에는 시즌 중에 메츠로 트레이드되어서, 15년 만에 뉴욕으로 복귀하였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공수주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윌리 메이스였지만, 뉴욕의 팬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1973년 8월 17일 레즈와의 경기에서 통산 660홈런을 기록한 그는 이 해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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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October로 불린 레지 잭슨은 "나는 윌리 메이스와 같은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손에 넣은 4개의 우승반지도 이루지 못한 꿈 앞에서는 빛을 잃을 뿐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윌리 메이스는 모든 선수들이 목표로 삼았던 동경의 대상이었다. 자신을 닮기를 원했던 배리 본즈가 그가 이루지 못한 베이브 루스와 행크 아론을 차례로 넘어서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 때에 윌리 메이스가 배리 본즈에게 건낸 말은 "Say Hey"는 아니었을까?


한국 최고의 스포츠 전문 잡지 Rookie에 기고한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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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손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