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애런 바이런은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고, 그런 자신을 가리켜서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유명해져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메이저리그에는 애런 바이런과는 반대로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몰락해져 있었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선수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1995년의 파업으로 인해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던 메이저리그를 구한 마크 맥과이어이다.
1998년에 새미 소사와 펼친 뜨거운 홈런 레이스는 미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끝내 마크 맥과이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에 70홈런을 기록하였다. 한 시즌 70홈런은 홈런왕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베이브 루스의 60홈런과 당시로서는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던 로저 매리스의 61홈런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위업이었다. 게다가, 프로에 입단하기 전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마크 맥과이어이지만,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은퇴의 기로에 서기도 했던 그이기에, 그의 홈런 기록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사실 현역 시절의 마크 맥과이어는 종종 베이브 루스에 비교되고는 했었다. 마크 맥과이어가 '거울 속 베이브 루스'라고 불린 이유는 10.6타수에 하나 꼴(베이브 루스는 11.8타수)로 홈런을 친 파워와 함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마크 맥과이어도 베이브 루스와 마찬가지로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서 성공한 케이스라는 점이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던 1981년에는 몬트리올 엑스포스로부터 투수로서 8라운드에 지명을 받기도 하였다. 프로행을 단념하고 진학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도 팀 메이트로 랜디 존슨 등을 제치고, 2학년 때에는 팀 내 최고인 방어율 2.78 등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크 맥과이어는 투수보다는 자신의 파워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타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3학년 때에는 1루수로 전향하였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첫해에 한 시즌 동안 32개의 홈런을 몰아치는 등 대학 통산 54홈런을 기록하면서, 마크 맥과이어는 대학 최고의 슬러거로 재탄생하였다. 1984년의 LA 올림픽에서는 부동의 4번타자로, 윌 클락과 배리 라킨 등과 미국 대표팀을 이끈 그는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드래프트에서는 전체 1순위 후보로도 거론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전체 10순위에 어슬레틱스에 지명을 받으면서 프로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대학 최고의 슬러거답게 그는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키면서, 2년만인 1986년에 확장 로스터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어슬레틱스의 상황상 원래의 포지션인 1루가 아닌 3루수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는 수비에 대한 부담 등으로 폭발적인 타격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1987년에는 개막전부터 주전 1루수로 기용되었지만, 여전히 메이저리그의 벽을 넘지 못하는 등 4월 한달 동안 타율 0.250, 4홈런, 12타점 등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부진 속에서도 어슬레틱스는 변함 없는 신뢰를 그에게 보냈고, 결국 마크 맥과이어의 방망이는 5월부터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5월 한달 동안 15개의 홈런을 몰아친 그는 8월 14일에는 엔젤스의 돈 서튼을 상대로 시즌 39호 홈런을 뽑아내면서, 프랭크 로빈슨과 윌리 버거가 가지고 있던 역대 신인 최다 홈런을 갱신하였다.
게다가, 9월 29일에는 시즌 49호를 쏘아 올리면서, 신인으로서 50홈런의 고지도 눈앞에 두었지만, 시즌 최종전인 10월 4일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는 "홈런은 언제던지 칠 수 있지만, 아들의 출산은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야구장이 아닌 병원으로 달려갔다. 마크 맥과이어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지막지한 홈런포도 한 몫 단단히 하였지만, 이런 가정적인 모습이 백인 중산층에게 강하게 어필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들의 출산을 이유로 결장한다는 것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 하는 동양권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과 집단, 어느쪽에 더 비중을 둘 것인지는 각 개인에 따라서 그 선택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개인이나 집단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우선시한다고 해서 그 선택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올림픽 대표 등에 소집되는 것을 거부하는 프로 선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여전히 쉽게 접할 수 있다. 집단과 개인 중에서 어느 쪽을 우위에 둘 것인가라는 문제는 닭과 달걀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냐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 어느 쪽이 무조건적으로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상호 존중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마크 맥과이어는 49홈런으로 신인으로서는 최초로 리그 홈런상을 차지하면서 만장일치로 신인왕에 선출되었다. 호세 칸세코와 마크 맥과이어라는 리그 최강의 [배시 브러더스]를 앞세운 어슬레틱스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를 제패하였고, 1989년에는 15년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마크 맥과이어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으로 30홈런 이상을 기록하였지만, 1991년에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면서 22홈런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낮은 타율과 많은 삼진, 타점 수에 비해서 찬스에 약한 모습 등을 이유로 전형적인 공갈포라던지 이른바 영양가가 없는 타자라던지 등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1992년에는 다시 42홈런, 104타점 등을 기록하는 등 주변의 비난을 일소에 불식시키면서 부활하였다.
부활한 마크 맥과이어의 앞길을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발꿈치와 허리 부상으로 인해 1993년과 1994년에는 그의 이름을 스코어보드에서 볼 수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잊혀져 가던 마크 맥과이어는 1995년에 39홈런으로 다시 부활한 후에, 1996년에는 타율 0.312, 52홈런, 113타점 등의 맹타를 휘둘렀고, 개인 통산 2번째 홈런왕을 차지하였다. 1997년에는 시즌 중에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되었지만, 양대리그를 합쳐서 타율 0.274, 58홈런, 123타점 등을 기록하였다. 로저 매리스가 1961년에 기록한 61홈런에 3개 차이로 육박하면서, 팬과 야구 관계자들은 캔 그리피 Jr.와 함께 둘 중에서 누가 먼저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갱신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개막전에서 만루홈런으로 시즌을 시작한 역사적인 1998년에는 5월이 끝났을 때에 이미 27홈런을 기록하는 등 로저 매리스를 향한 고독한 레이스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6월 한달 동안 메이저리그 월별 최다인 20홈런을 친 새미 소사가 홈런 레이스에 참가하면서,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들이 경합을 펼친 27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과 같은 데자뷰를 보는 느낌이었다. 최종적으로 메이저리그 최초로 한 시즌 70홈런을 밟은 마크 맥과이어가 66홈런에 그친 새미 소사를 따돌리면서 그 승자가 되었다.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27년만에 갱신한데다가, 홈 베이스 근처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이나 경쟁자인 새미 소사를 칭찬하는 등 마크 맥과이어의 인간적인 풍모에 많은 팬들은 매료되었고, 또한 이들의 홈런 레이스로 메이저리그는 파업으로 인해 추락한 인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1999년에도 65홈런을 기록하면서, 행크 아론의 통산 최다 홈런을 갱신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장미빛 미래가 이야기되기도 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2000년과 2001년에는 32홈런과 29홈런에 그쳤다. 특히, 2001년에는 멘도사 라인에도 근접하지 못한 타율 0.187라는 극악의 성적을 남긴 그는 "더 이상 몸값에 걸맞는 활약을 펼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유니폼을 벗었다. 그가 은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은 '아버지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아들인 매튜의 말도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에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갱신했을 때에 "하나님이 지금과 같은 홈런 기록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1993년과 1994년에) 그렇게 심한 부상이라는 시련을 주었다"고 말하거나 가족을 중시하는 등 전형적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인 관계로, 마크 맥과이어는 미국의 주류들로부터 언제나 열렬한 박수 세례를 받았다.
통산 583홈런에, 홈런타율(홈런 하나를 몇 타수만에 쳤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에서 10.6으로 베이브 루스를 뛰어 넘었기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처럼 느껴지던 마크 맥과이어였지만, 그의 몰락은 한순간이었다. 2001년에 배리 본즈가 한 시즌에 73홈런을 친 이후에 불거져 나온 스테로이드 스캔들로 인해 그는 2005년 3월에 하원의 청문회에 출석할 수밖에 없었다. 청문회에서 마크 맥과이어는 스테로이드의 사용 여부를 묻는 질문에 "과거에 대해서 답변하고 싶지 않다"고 묵비권으로 일관하였다. 이미 현역 시절에 안드로스테네디온(당시에는 금지 약물이 아니었다)을 복용한 그이기에, 그가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는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묵비권 행사는 사실상 인정하는 꼴이었다.
스테로이드 스캔들은 그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자격 요건(은퇴한지 5년이 지난 후에 투표의 대상이 된다)을 갖춘 2007년에 현실로 나타났다. 은퇴를 표명했을 때에 마크 맥과이어가 HOFer가 될 것이라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고작 23.5%의 득표율에 그치면서 고배를 마셨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해서 올린 기록을 가진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기자들 사이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크 맥과이어로서는 겨우 1.1%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서 완전히 아웃된 호세 칸세코와는 달리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실제로 "마크 맥과이어는 스테로이드 테스트에서 단 한번도 양성 반응을 보인 적도 없고, 게다가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던지 "타자들만이 아니라 투수들도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였기에, 그 시대 자체가 스테로이드의 시대였다"던지 등으로 옹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결국, 개인적으로도 라파엘 팔메이로나 배리 본즈, 새미 소사 등 스테로이드 스캔들과 관련된 선수들이 하나 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조건을 갖추어 갈 때에 마크 맥과이어도 은근 슬쩍 쿠퍼스타운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명예의 전당에 2번째 도전을 눈 앞에 둔 그에게, 뜻하지 않는 치명타가 발생하였다. 바로 2007년 12월 13일에 조지 미첼의 리포트가 발표된 것이다.
조지 미첼의 리포트를 통해서 투수들도 스테로이드를 복용했음이 명확해졌지만, 그보다 한층 더 안티 스테로이드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졌기 때문이다. 마크 맥과이어로서는 헌액은 커녕 다음에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도 불명확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번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있다. 마크 맥과이어가 공개적으로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에 과연 그를 비난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실 비난은 커녕 현대 의학과 야구의 만남이라고 칭송한 경우도 있었다. 금지 약물이 되기 전에 일로 여론 재판을 당하거나 모든 기록들이 폐기되는 것만이 정답일까? 1980년대 이후로 누가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서 문득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쳐라"고 한 예수님의 말이 떠오른다.
한국 최고의 스포츠 전문 잡지 Rookie에 기고한 원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위의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힘은 남자들의 판타지가 아닌가? 그와 마찬가지로 "스타라는 명예와 돈을 거머쥔 메이저리거에게 팬들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도덕적인 모습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105마일의 직구일 뿐이다."는 켄 캐미니티의 말이 야구 팬의 판타지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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