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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는 영웅과 같다. 사람들은 마지못해서, 누군가는 해야 하기 때문에 포수가 된다.


"당신은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거죠?"
"아무도 안 하니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 아무도 하려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거야."
-영화 [다이하드 4.0]에서 매튜와 존 매클레인의 대화 中


중학교 시절, 나는 야구소년이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 종이 치면 마치 [색, 계]의 양조위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운동장을 향해 뛰쳐 나갔고, 눈 깜짝할 새 수비 위치를 찾아서 45분전 일시중지된 게임을 이어 나갔다. 제한 시간은 10분, 그 시간 내로 한 이닝을 마쳐야만 한다. 투수가 볼을 던지면 짜증섞인 소리가 터져나왔다. 카스테라처럼 말랑말랑한 연식 야구공은 대개 높다란 곡선을 그리며 조회대 한복판을 향해 날아들었고, 숱한 안타와 허다한 실책이 쏟아졌다. 그 시절, 우리에게 포수는 필요치 않았다. 그저 조회대 뒤에서 지키고 선 볼보이가 있을 뿐. 포수라는 포지션은 우리에게 있어, 마치 농구대잔치의 덩크슛 만큼이나 희귀하고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지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교에 진학하며 사정은 달라졌다. 교장은 축구광이었다. 그는 교사들을 그러모아 매주 토요일 축구시합을 하는 열의는 있을지언정, 조회대를 향해 공을 던지는 야구소년들을 후원하려는 선의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처음에는 완고했던 우리는 점차 테니스공으로 권력과의 타협을 시도해 봤지만, 나중에 깨달은 것은 축구광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화해도 불가능하다는 뼈아픈 사실이었다(그때의 트라우마로 나는 지금까지도 결코 축구를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 악수를 내민다고 해서 권력의 개가 쏘아대는 최루탄이 드라이 아이스로 바뀌지는 않는 법,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정통으로 회귀하는 것, '진짜 공'을 사용해서 포수를 두고 시합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조회대를 향하지 않고 시합을 하는 한, 김영삼이라도 감히 훼방을 놓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나름의 쓸모를 두고 만들어놓은 비자금을 털어 포수 장비를 구입했고, 커다란 미트도 하나 샀다. 거기에 기아 타이거즈 헬멧만도 못한 새빨간 저질 헬멧도 하나 얻어왔다. 이제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 것인가, 다시 말해 저 세차게 날아오는 야구공을 받아내는 희생을 누가 감수할 것인가, 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하필이면, 애석하게도, 어쩌다가, 우연찮게, 아니면 필연적으로, 젠장맞게, 지랄같이 내가 그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단지 진짜 공을 몇 번 받아본 적이 있다는게 이유의 전부였다. 나는 그건 전부 장난이었다고, 내가 받은 공은 장호연이 왼손으로 던진 아리랑볼보다도 느리고 먹기 좋게 날아왔다고, 앞에 타자 같은 것은 없었다고, 그리고 파울팁이나 폭투 같은 것도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좀비들 앞에서는 별무소용이었다.

그들은 내게 강제로 보호대를 착용시키고, 마스크를 씌우고, 손가락을 비틀어 미트를 끼웠다. 그리고 흡사 북한산 등산로 공중화장실에 놓인 변기에 앉은 듯한 자세로 실내화가방 뒤에 주저앉혔다. 하얀 공이 바운드에 가깝게 날아왔고,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미트를 움츠렸다. 눈을 떠보니 미트 안에는 공이 사각사각 회전하며 들어와 있었다. 로저 노링턴 심포니의 베토벤 연주가 끝났을 때나 터질 법한 격렬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네가 포수다, 라고 누군가 말했다. 마치 '빛이 있으라'는 야훼의 선언과도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 선언대로, 나는 우리 팀의 포수가 되었다.

고교에서는 쉬는 시간을 이용한 10분단위 경기가 불가능했다. 우리 교실은 4층 중간께에 있었고, 그 자리에서는 '점퍼'가 아닌 이상 운동장까지 나가는데만도 5분 이상이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우리의 경기는 이제 모든 수업이 종료되고 난 뒤, 그리고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낮 시간대로 변경되었다. 한여름은 금방 찾아왔다. 가만히 서 있어도 온 몸이 녹아내리는 스크류바처럼 느껴지는, 찐득찐득하고 텁텁하며 불쾌한, 손예진이 반갑게 웃으며 말을 건네도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짜증이 솟구치는, 그런 종류의 더위였다. 언제나처럼 토요일 수업이 끝났고, 우리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나는 교복 윗도리를 벗고, 프로텍터를 착용하고,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운동장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눈이 따끔따끔 아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쓰러진건 투수였다. 아리랑볼도 제대로 제구하지 못해서 네 장의 유리창을 깨고 두 명의 여학생을 다치게 만든, 박동희의 제구력과 장호연의 구속을 겸비한 축복받은 녀석. 9명을 채우기 위해 팀에 끼워줬더니 투수 안 시켜주면 빠지겠다고 협박하는 방식으로 마운드를 차지한 녀석. 놈은 두 개의 볼 세븐과 두 개의 안타를 내주고 또다시 볼 파이브로 몰리더니 '투수 못해먹겠다'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야구의 일부인 마운드를 사랑할 뿐, 오기와는 상관없다"는 것이 놈의 입장 표명이었다.

돈이 걸린 시합이었다. 놈은 자신이 빠지면서 팀이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지만, 팀원들이 보기에 이건 승리를 위해 하늘이 점지해 주신 행운이었다. 나는 주저없이 수유리에서 전학온 우익수를 마운드로 호출했다. 뉴키즈의 조이 매킨타이어를 빼닮은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그는 몇 번이나 외야에서 내 미트까지 다이렉트로 송구한, 강견의 소유자였다. 그의 연습구 초구를 받는 순간 나는 불테리어에 왼손을 물어뜯긴 듯한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다. 바닷물 위를 떠다니는 듯한 소프트 토스에 익숙해 있던 포수 미트니까. 상대 다음 타자는 갑자기 아무도 쓰지 않고 바닥에 방치해둔 헬멧을 찾더니 머리에 썼다. 한기범을 꼭 닮은 그가 헬멧을 쓰자, 마치 강아지 고추에 콘돔을 씌운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나는 시험삼아 플레이트, 아니 르까프 실내화가방 바깥쪽으로 리드를 해봤다. 정확하게 그 지점으로 공이 꽂혔다. 이번에는 실내화가방 안쪽으로 미트를 옮겼다. 역시 정확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매킨타이어가 내게 가까이 와보라고 하더니, 작은 소리로 "커브 던질 수 있는데..."라고 이야기했다. 커브라, 커브. 그 단어는 아직 면허조차 없던 내게는 교통사고 소식에서나 가끔 접할 수 있던 생경하고도 멀리 떨어진 대상이었다. 차라리 그보다는 스타디움 히어로 게임의 마구가 훨씬 우리에게 가까웠다. "아리랑볼 말하는 거냐?" "아니, 커브. 스냅 걸어서 던지는 거 말이지." 갑자기 포수를 보게 된 이후 깜빡 잊고 마스크를 안 가져와서 맨몸으로 공을 받던 날 빼고는 처음으로, 거대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강시 영화를 세편 보고난 뒤 중국집 앞을 지날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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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호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