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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섹스는 타고난 성 - 즉, 성별을 의미하고, 젠더는 사회 문화 환경에 의해서 정해진 성을 의미한다.


이상하게도 야구는 여성과는 무관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하다. 배구나 농구, 축구 등은 물론이고, 격렬한 스포츠인 복싱이나 레슬링 등도 여성이 플레이어로서 참가하고 있다. 하지만, 야구만큼은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필드에서 여성을 보는 일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야구가 여성과는 거리가 지구에서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야구 영화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실존했던 여성 프로야구 리그를 다루고 있고, 지금 현재도 미국이나 일본, 한국에는 여성 야구 리그가 있다.

한 때 KBO의 규정에는 "의학적으로 남자가 아닌 자는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없다"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국 여자 야구의 대모인 안향미의 선구적인 도전 속에서 삭제시킬 수 있었고, 1999년 4월 30일 배명고와의 대통령배 준결승에서는 덕수정보고의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서기도 하였다. 공 3개를 던진 것이 전부였지만, 한국 야구에서 여자 선수가 출전한 유일한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몇 년 전에는 한국계로 마이너리그에서 심판을 하고 있던 샤나 국이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최초의 여성 심판의 탄생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 심판은 1904년에 노스 타코타에서 세미 프로 경기로 데뷔한 아만다 클레멘트였다. 그후, 그는 1911년까지 네브래스카, 아이오와, 캐롤라이나, 미네소타 등에 있던 세미 프로 리그에서 심판으로 활약하였다. 아만다 클레멘트가 여성 심판으로서 장기간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성'에 있었다. 당연히 여성이 심판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선수나 팬들은 성차별적인 발언이나 야유를 퍼부었다.

한번은 스트라이크 볼 판정을 놓고서, 한 선수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노골적인 성차별적인 발언을 늘어놓았다. 이런 상황을 도저히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던 그는 경기 중간에 야구장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야구 심판을 포기하려는 그를 지지한 것은 언론이었다. 당시의 기자나 야구 관계자들은 야구를 신사도에 근거한 경기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신사들의 경기에서 아만다 클레멘트는 레이디로서 보호할 대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만다 클레멘트의 선구적인 활약 속에 머지 않은 장래에 메이저리그에도 여성 심판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지만, 그가 은퇴한지 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현재도 메이저리그는 금녀의 필드를 고수하고 있다. 아만다 클레멘트가 선수나 야구 관계자, 기자는 물론이고 팬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도, 예상과는 달리 메이저리그에 여성 심판이 등장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메이저리그의 보수성에 있지만, 아만다 클레멘트가 필드의 유일한 홍일점으로서 오로지 소비만 된 것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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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지금과는 달리 과거에는 한국에서 피겨 스케이팅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렇게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그림의 떡이던 피겨 스케이팅이 2006년에 3월에 열린 세계 주니어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피겨 스케이팅은 한국 최고(?)의 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김연아는 피겨 스케이팅을 넘어서 '국민 요정'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세간의 관심은 오로지 김연아 개인에게만 집중되고 있다(당연히 그렇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어떤 스포츠나 스타를 발굴하는 이유는 그 스타를 통해서 열광적인 팬 뿐만이 아니라, 경기장 시설의 개선이나 확충 등 저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동계 스포츠는 별로 안좋아하기 때문 - 다른 이유 없다. 추운 것을 싫어한다 - 에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피겨 스케이팅을 포함해서 동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경기장이 태부족이라고 알고 있다. 게다가, 대표적인 경기장인 목동 아이스 링크의 경우에는 아이스하키나 쇼트트랙 등에 일반인까지 사용하기에 연습 시간도 부족하고, 빙판의 질도 문제가 있다고 들었다. 즉, 김연아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탄생했지만, 그 자산을 이어갈 수 있는 유산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김연아라는 개인이 소비만 되고 있을 뿐인 것처럼 아만다 클레멘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구는 여전히 여성이 접근할 수 없는 스포츠였다.

바위를 친 계란들

아만다 클레멘트 이후 야구에서 다시 여성 심판이 나타난 것은 반세기 이상이 지난 1970년대였다. 1967년에 버니스 게라는 알 소머스 야구 심판 학교에 지원해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내셔널 스포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고, 뛰어난 자질을 보이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졸업 후에 그를 심판으로 받아주겠다는 리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공공연한 차별 속에서도 야구 (심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앞세워서 계속해서 도전한 끝에 1A의 뉴욕 - 펜 리그에 고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된 NL의 회장인 필 필튼은 그의 키가 157㎝라는 이유로, 계약을 무효화하였다. 이에 버니스 게라는 뉴욕주 인권위원회에 제소하였다. 그의 제소를 받은 뉴욕주 인권위원회는 1970년 11월에 그의 계약을 무효화한 것은 "신장이 적은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이라고 판정하였다. 하지만, NL이 항소하면서, 그가 실제로 필드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197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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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월 24일 제네바 세너터스와 오번 필리스의 경기에 심판으로서 나섰다. 하지만, 이 경기가 그의 첫 경기이자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경기가 열리기 전부터 "야구를 모독하지마라" 등의 협박장이 날아왔고, 경기 중에도 스탠드와 덕아웃에서는 야유가 난무하였다. 게다가, 4회에 그의 판정에 불만을 품은 필리스의 감독이 "심판복을 벗고, 부엌에서 감자나 깎아라"는 노골적인 성차별을 퍼부었고, 이에 격분한 버니스 게라는 그 자리에서 야구장을 떠났다. 그 경기를 끝으로 심판을 그만둔 그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뉴욕 메츠의 홍보 담당으로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결국, 최초의 마이너리그 여성 심판인 버니스 게라는 단 한경기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아만다 클레멘트와 같은 언론이나 야구계의 따뜻한 시선이 있었다면, 아마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이어서 여성 심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루키리그와 1A인 미드웨스터 리그에서 활약한 크리스틴 렌이었다. 크리스틴 렌은 1977년에 미드웨스터 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라운드 안팎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된 성차별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

마이너리그 여성 심판 1, 2호가 제대로 활약도 해보지 못하였지만, 3번째 주자였던 팸 포스터머는 달랐다. 팸 포스터머는 1977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면서, 3A까지 진출하였지만, 메이저리그를 밟는데는 실패하였다. 그 역시도 야유와 성차별은 일상다반사였지만, 앞선 선구자들과는 달리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도저히 참기 어려운 야유나 발언에는 감독이 되었던 선수가 되었던 가차없이 퇴장을 시켰지만, 웬만한 야유는 야구 경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자신을 여성이 아닌 남성, 혹은 다른 사람과 동등한 심판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성별을 이유로 특별히 대우받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였다. 외모적으로도 머리를 짧게 깎았고, 멀리서 모자에 심판복을 입은 그를 보고 외견상 성별이 구분되지 않았다. 남성과 같이 저음으로 콜을 하였고, 남성 심판 이상으로 권위적으로 감독이나 선수를 상대하였다. 또한, 경기가 끝난 후에도 다른 심판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등 심판의 일부로 동화될 수 있도록 그라운드 안팎에서 노력하였다. 자신을 남성화하는 것으로 남성의 전유물화된, 혹은 성차별이 일상화된 프로야구판에서 입지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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팸 포스터머는 자신을 성별이 아닌 심판으로서만 평가해주기를 바랬지만, 홈 플레이트에 후라이팬이 놓여져 있거나, "요리 등 가정일을 할 줄 모르니까 심판을 하고 있다"는 등 성차별이 노골적으로 포함된 야유와 위협을 받았다. 또한, 선수가 볼판정에 대한 불만을 'Fuxx'이 포함된 말로 지껄일 경우에는 그 역시도 'Fuxx'이 들어간 말로 응수하면서 퇴장 처분을 내렸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말했지만, 야유와 위협은 야구 경기의 일부였고, 단지 그에게는 성차별이 포함된 것이 다른 심판과는 달랐을 뿐이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이나 야유, 불평 속에서 심판으로서의 기량과는 관계된 것이 없었을 정도로 마이너리그를 대표하는 심판 중의 한명이었다. 당시의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바트 지아매티는 그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바트 지아매티의 옹호 속에 그는 1988년과 1989년에 메이저리그의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최초의 여성 심판이 되었고, 또한 1988년에 열린 브레이브스와 양키스의 명예의 전당 기념 경기에도 참가하였다. 팸 포스터머가 메이저리그에 승격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말들도 나왔지만, 그의 후견인이었던 바트 지아매티가 1989년 9월에 숨을 거두면서 메이저리그 심판은 커녕 1989년을 끝으로 해고당하였다.

팸 포스터머에 이어서 1988년에 마이너리그 심판으로 테레사 콕스가 데뷔했지만, 성차별의 높은 벽을 뚫지 못하고 1992년에 심판복을 벗었다. 2001년과 2003년에는 리아 코르테시오와 샤나 국이 각각 데뷔하였다. 특히, 리아 코르테시오는 2007년에 팸 포스터머에 이어서 메이저리그의 시범경기에 출전하는 등 '금녀의 벽'을 깰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2007년 시즌이 끝난 후 뜻밖에도 해고 통지를 받았다. 또한, 샤나 국도 2004년이 심판복을 입은 마지막 해였다.

버니스 게라를 시작으로 해서, 크리스틴 렌, 팸 포스터머, 테레사 콕스, 리아 코르테시오, 샤나 국 등은 메이저리그의 심판이 되기에는 기량 자체가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팸 포스터머나 리아 코르테시오 등은 메이저리그의 심판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도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심판으로서의 기량이 아닌 성별이었다고 생각한다.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은 인종이나 종교, 민족, 국적, 국경, 성별 등을 초월해서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또한 즐길 수 있는데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문득 한국 최고의 메타사이트로 자타공히 인정을 받고 있는 올블로그에서 김연아장미란을 검색한 결과를 보면서, 고착화된 여성의 상품화를 떠올렸다면 지나친 오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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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손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