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31일에 조지아 주에서 소작농을 하던 가정에서 태어난 재키 로빈슨은 어릴 때부터 스포츠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고교와 포사데나 주니어 컬리지를 거친 그는 1939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확실히 그가 일반적인 흑인보다도 더 좋은 생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UCLA에서도 야구를 비롯해서 농구, 아메리칸 풋볼, 육상 - 특히, 넓이뛰기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 후인 1941년에는 하와이의 아메리칸 풋볼 세미 프로팀인 호놀룰루 베어스에서 쿼터백으로 1년간 활동하였다.
1942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고, 그는 군에서도 야구와 아메리칸 풋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육군 중위로 제대한 1945년에는 니그로리그의 명문인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 입단하였고, 유격수로서 타율 0.387 등을 기록하였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다저스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1946년에는 3A인 몬트리올 로얄스에서 타율 0.349 등을 기록한 그는 1947년 4월 15일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필드에서 흑인으로서는 20세기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다.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것은 미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메이저리그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1947년에도 사회에서는 여전히 흑백 분리 주의가 상식이었다. 예를 들면, 1944년에 육군 중위이던 재키 로빈슨도 버스에서 유색인종석에 앉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군법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무죄가 되었지만, 재키 로빈슨 자신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군과 인종 차별이라는 두가지 거대한 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통감하였다고 회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이 "군대에서의 차별을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린 것도 1948년이었고, 앞선 글에서 언급한 '플레시 대 퍼거슨'사건 - 즉, '분리하지만, 평등하다'가 위헌이라는 브라운 판결이 나온 것은 한참 후인 1954년이었다. 즉, 아파르트헤이트가 유지되던 사회와는 달리 필드 위에서 플레이를 펼치는데 피부색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메이저리그는 선구적으로 인종 통합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41년만에 약속을 지킨 브랜치 리키
1945년 10월 23일 다저스의 3A인 몬트리올 로얄스의 사장인 헥터 라신은 기자들에게 흑인인 재키 로빈슨과 계약을 맺었음을 발표하였다. 이 계약을 실제로 진두지휘한 것은 다저스의 공동 오너 겸 GM이던 브랜치 리키였다. 1943년부터 1950년까지 다저스의 최고 책임자로 있던 그는 재키 로빈슨을 비롯해서, 돈 뉴컴, 로이 캄파넬라 등을 영입하였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인종 차별의 벽을 철폐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에는 과거에 한 '자신과의 약속'도 일부분 작용하였다.
그가 오하리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코치를 하고 있던 1904년에 팀의 중심 타자로서 1루수이던 찰리 토머스라는 흑인 선수가 있었다. 한번은 원정 경기를 위해서 머물려고 한 호텔에서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숙박을 거부당하였다. 브랜치 리키는 자신의 방에 매트를 깔고 잘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는 밤새도록 찰리 토머스의 "검은 피부, 검은 피부"라는 흐느낌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같은 국민인데도, 피부색의 차이로 인해 차별을 받는 현실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힘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자신에게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이 41년만에 재키 로빈슨의 계약으로 지켜진 것이다.
그렇다면, 브랜치 리키는 사회적으로 흑백 분리 정책이 통용되던 시기에 어떤 묘수로 이 난관을 헤쳐나간 것일까? 사실 브랜치 리키가 두려워했던 것은 백인 선수들의 반발보다도 팬과 기자였다. 그들이 흑인 메이저리거의 출현에 불만을 가지지 않도록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가 직접적으로 니그로리거를 물색할 경우에는 언론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백인 언론에 그의 의도가 노출될 경우에는 비난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원천봉쇄될 위험성이 있었다.
이러한 주목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1945년 5월에 새로운 니그로리그를 만들 계획을 발표하였다. 니그로리거를 메이저리그에 편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흑백 분리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기에 어떤 반발도 사지 않고, 다저스는 공공연하게 니그로리거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그는 즉시전력이 될 수 있는 니그로리그의 스타플레이어들은 그의 계획에서 제외시켰다. 사첼 페이지, 조쉬 깁슨, 힐튼 스미스, 벅 오닐, 레온 데이, 하워드 이스터링, 윌리 웰스 등 니그로리그의 스타들이 즉시전력으로 메이저리그의 백인 선수들과 경쟁을 펼칠 경우에는 백인 관중들을 자극할 것이 뻔할 뻔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 합당한 인물이 바로 재키 로빈슨이었다. 니그로리그의 초년생으로 명목적으로도 바로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고, 게다가 그는 흑인으로서는 엘리트였기에 흑인 사회의 지지는 물론이고 백인 사회의 거부감도 희석시킬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재키 로빈슨은 대학 등에서 백인과 플레이를 펼친 경험이 있기에, 메이저리그에 승격되었을 때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즉,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갖추어야만 하는 '어떤 경우에도 보복행동을 하지 않는 인내력'을 브랜치 리키는 재키 로빈슨이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브랜치 리키에게 필요했던 것은 '통제가 가능한 니그로리거'였고, 여기에서 '통제'는 기득권세력에게 반항하지 않는 수준의 교육을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브랜치 리키가 흑인에게 메이저리그의 문호를 연 이유가 무엇이 되던 그의 결단이 인종 통합을 향한 거대한 첫발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겠지만,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그 시기가 상당히 늦어졌을 것임은 틀림이 없다. 재키 로빈슨은 물론이고, 행크 아론이나 윌리 메이스 등의 기록도 없었을 것이다.
완고한 인종 차별주의자의 최후
1942년에 다저스의 레오 드로셔가 "만약 가능하다면, 흑인 선수를 영입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에, 종신 커미셔너로서 철권통치를 하고 있던 케네소 랜디스는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그런 일은 없지만, 메이저리그의 각 구단이 흑인 선수를 영입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발언하였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는 아라파트헤이트가 없다는 그의 말은 위선 그 자체였다. 조쉬 깁슨의 영입을 추진한 파이러츠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케네소 랜디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케네소 랜디스가 커미셔너에 취임한 것은 1920년 11월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오너들이 이전까지 없던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커미셔너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야구 도박과 관련된 '블랙삭스 스캔들'로 인해 실추된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커미셔너가 되기 전까지 직업은 연방법원의 판사로, 당연히 그는 극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 자신이 판사로 무죄라고 말했던 '블랙삭스 스캔들'과 관련된 8명의 선수를 야구계에서 영구추방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첫 임무를 시작한 그는 24년간 메이저리그의 독재자로서 군림하였다.
사실 그가 커미셔너로 취임하던 당시의 야구계는 '블랙삭스 스캔들'이라는 돌발 사태뿐만이 아니라, 야구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기였다. 야구계뿐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합법 비합법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아파르트헤이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의 건국 이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을 야구계는 오로지 보고도 못 본 채 하거나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일관하였다. 흑백 분리주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셔널 패스타임'을 내세우고 있는 메이저리그인 점을 생각하면, 그들 자신이 스스로 국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인구를 배제하고 있었다.
누구던지 재능과 노력만 있다면, 기회와 경쟁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에 기반한 메이저리그가 성공할 수 있는 재능과 열정을 가진 선수를 원천적으로 참가를 봉쇄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필요가 있던 시기에 오너들은 극보수인 케네소 랜디스에게 강력한 힘을 주었고, 그는 예상대로 메이저리그에서의 인종 차별주의를 고수하였다. 오히려 강화하였다. 스프링캠프나 마이너리그의 팀이 니그로리그의 팀이나 흑인 선수가 있는 팀과의 경기를 펼치는 것에 제한을 가하였고,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근거로 인종 통합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1943년에 니그로리거의 계약권을 가진 대리인이 메이저리그의 오너들의 모임에서 발언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이미 전년도에 위에 말한 것처럼 '흑인 선수를 영입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그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참가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발언할 기회만을 주었을 뿐 흑인에게 메이저리그의 문을 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그가 1944년에 죽었을 때에 흑인 언론이 '위대한 백인 야구의 아버지'라고 비꼰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그에 이어서 제2대 커미셔너로 취임한 알버트 챈들러는 "개인적으로 4가지 자유(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신봉한다. 흑인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훌륭하게 복무하였기에, 야구에서도멋진 플레이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고 발언하였다.
당연히 그가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줌으로서 브랜치 리키가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로서 재키 로빈슨을 데뷔시킬 수 있었다. 또한, 흑인과는 함께 야구를 할 수 없다는 야구계의 반발이 있을 때에도 강력하게 막은 것도 바로 그였다. 메이저리그가 상원의원 출신인 그를 커미셔너로 영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의회를 중심으로 '메이저리그가 반독점 금지법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견해에 메스를 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메이저리그는 반독점 금지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한 셈이다.
이윤이 있다면 지옥이라도 달려간다
메이저리그에서 재키 로빈슨 이전에도 니그로리거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극보수주의자인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의 반대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자본가로서 구단의 오너의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분명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니그로리거를 영입하면 팀 성적은 향상되겠지만, 백인 팬들의 반발로 인해 흥행에는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미국의 흑인 인구의 75% 이상이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메이저리그의 대부분의 구단은 남부가 아닌 북부지역을 프랜차이즈로 두고 있었다. 니그로리거를 영입한다고 해도, 흥행적으로 기대할 부분이 그렇게 없었다.
하지만, 이 불일치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완전히 급변하였다. 군수공장의 인력이 급격하게 필요하게 되면서, 남부지역에 살던 몇 백만명의 흑인 노동자가 북부지역의 공업지대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북부지역의 흑인 인구는 1940년대에 50%나 증가하였고, 특히 디트로이트에서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연간 6만명의 흑인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니그로리그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고, 그 관중수도 증가하였다. 1944년에 니그로리그의 동서 올스타전이 4만 6,247명을 동원한데 비해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은 2만 9,589명에 불과했다. 또한,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화이트삭스와 브라운스의 경기에 약 1만 9천명이 야구장을 찾았지만, 같은 날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의 경기에는 약 3만명이 입장하였다. 니그로리그의 활황세에 브랜치 리키나 빌 벅 등과 같은 혁신적인 오너들은 위기감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테드 윌리엄스, 밥 펠러, 조 디마지오, 스탠 뮤지얼 등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들이 징병되면서, 메이저리그는 흥행에 큰 타격을 입었다. 1940년에 982만 3,484명이던 관중수는 1942년에 855만 3,569명, 1943년에는 746만 5,911명, 군인을 무료 입장시킨 1944년에도 8772만 2,746명에 불과했다. 스타들이 복귀한 1945년 이후로 급성장하였지만, 나날이 줄어드는 관중수에 오너들은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책으로서 브랜치 리키나 빌 벅 등은 니그로리거에 주목하였다. 브랜치 리키는 "흑인 선수의 참가로 메이저리그가 진정한 내셔널 스포츠로서 지위를 확립할 수 있고, 또한 경영면에서도 이득이 된다"고 설득하였지만, 다수의 오너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재키 로빈슨을 영입한 다저스가 1946년에 179만 6,824명을 넘어서 1947년에는 180만 7,526명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흑인 선수를 영입할 경우에는 백인 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저스의 성공을 지켜본 메이저리그의 각 구단들도 점진적으로 흑인 선수를 영입하였다. 게다가, 흑인 선수의 영입을 통해서 메이저리그는 흑인 자본의 확보라는 시장의 확대뿐만이 아니라 급성장하고 있는 니그로리그를 미연에 뿌리채로 제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결국, 재키 로빈슨이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된 것은 인종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진일보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자생적인 흑인 야구를 몰락시키는 도화선이 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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