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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재키 로빈슨을 찾아서 (2)에서 재키 로빈슨이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로 데뷔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서 메이저리그의 내부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재키 로빈슨을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게 한 흑인 사회의 역할, 혹은 동력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재키 로빈슨의 글들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은 그가 데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오로지 백인 사회 - 혹은, 메이저리그의 시혜로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재키 로빈슨이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된 주요한 배경으로 꼽는 것은 흑인 사회 내부의 힘이다. 미국과 한국의 온도 차이,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아마도 독재권력이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는 순수 스포츠 - 혹은, 완전히 정치성이 배제된 스포츠를 최고의 덕목으로 조장한 것 때문은 아닐지 싶다. 정통성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정권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거세하기 위해서 변화는 오로지 '위에서 하사하는 은혜'로만 인식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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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선수에게 메이저리그가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서 양키스의 제이크 파웰의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 그 도화선이 되었다. 1930년에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데뷔한 제이크 파웰은 주로 백업 외야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11시즌을 보냈다. 1938년 7월 29일 화이트삭스의 경기로 시카고 온 제이크 파웰은 경기전에 WGN과 라디오 인터뷰를 가졌다. 브로드캐스터인 밥 엘슨이 "오프 시즌은 어떻게 보내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 "오하이오의 데이턴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말에 덧붙여서 그는 "나는 니거의 검은 머리통을 경찰봉으로 두들기고 있다."고 말하였다. 역 등에서 이 인터뷰를 들은 사람들 - 흑인은 물론이고, 백인으로부터도 WGN에 항의 전화가 쇄도하였다. 다음날 밥 엘슨은 자신도 제이크 파웰의 발언이 불쾌했다고 사과를 했지만, (백인) 주류 미디어들 - 예를 들면, 스포팅 뉴스나 시카고 트리뷴, 뉴욕 타임즈 등은 어떤 의도가 없이 한 애드립에 불과했다던지 말실수였다던지 등으로 별 것 아니다는 식의 보도 형태를 보였고, 반면에 흑인 미디어들은 그의 발언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메이저리그의 흑백 분리 정책을 비판하였다.

파웰, 도화선에 불을 땡기다

흑인 미디어를 비롯해서 흑인 사회 전체가 술렁이면서, 커미셔너인 케네소 랜디스는 제이크 파웰에게 10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제제에 불과했다는 것은 출장 정지 처분을 내리면서, 케네소 랜디스는 "그의 발언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순간적인 말실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워싱턴 포스트는 적반하장격으로 "그가 야구에서 배트를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봉을 가지고서도 제 역할을 못하였다면, 흑인들은 전혀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면서, 그의 발언에 항의하는 흑인 언론이나 사회를 비꼬았다.

이러한 백인 주류들의 '방구 뀐 넘이 성내는 꼴'에 뉴욕 에이지나 시카고 디펜더 등 흑인 미디어들은 한발 더 나아가서, "제이크 파웰의 무기한 출장 정지"를 요구하였고,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당시 양키스의 오너인 제이콥 루퍼트가 경영하고 있는 맥주를 불매하자고 호소하였다. 또한, 이러한 차별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고, 공공연하게 옹호할 수 있는 배경에는 메이저리그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흑인뿐만이 아니라 백인들도 동조하면서, 문제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예를 들면, 출장 정지에서 돌아온 8월 16일 세네터스와의 경기에 그가 외야에 수비하러 나갔을 때에, 그를 향해 날아온 것은 야구볼이 아닌 관중석에서 던져진 빈 병이었다. 결국, 제이크 파웰은 8월 20일에 시카고 디펜더의 뉴욕지부를 방문해서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제이크 파웰은 출전 기회가 극감하였고, 1940년 12월에는 세네터스로 트레이드되었다가, 1945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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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파웰의 인종 차별 발언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 언론이 메이저리그의 흑백 분리주의에 대한 문제점이라는 아젠더를 선점하게 되었고, 이 아젠더의 선점 및 강화를 통해서 흑인 사회는 물론이고 백인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흑인 플레이에게 우호적인 언론의 힘이 강화되면서, 그들이 메이저리그의 아파르트헤이트가 가지는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분리하지만 평등하다'가 위헌이라는 브라운 판결이 나오기 전에 메이저리그에서 흑인 플레이어에게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게 된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공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면서, 짐 크로우 법을 표면적으로 폐지시키는 계기가 된 1955년의 로사 파크 사건의 메이저리그 버전이 바로 '잭 파웰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1955년의 로사 파크 사건 이후 린든 존스 대통령에 의해서 시빌 라이츠 액트가 제정된 것은 1964년으로 9년이 걸렸고, 공교롭게도 1938년의 '잭 파웰의 사건' 이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것은 정확하게 9년 후인 1947년이었다. 메이저리그가 사회에 비해서 먼저 흑백 분리주의를 폐지하게 된 것은 수면 아래에 잠복하고 있던 불만이나 문제점 등을 부상시키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잭 파웰의 사건'을 개인의 실수에 따른 우연한 사건으로도 볼 수 있지만, "메이저리그의 노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이 잭 파웰의 사건을 일으켰다."는 웬델 스미스의 말처럼 '잭 파웰의 사건'은 메이저리그가 아파르트헤이트를 버리지 않는 한 언제던지 촉발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어쨌든 '잭 파웰의 사건'으로 야구계의 인종 분리주의는 이슈화가 되었고, 그 이슈를 선점한 흑인 언론의 성장과 함께 '재키 로빈슨'이라는 또 다른 필연을 불렀다.

재키 로빈슨을 선택한 사람들

재키 로빈슨이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로 데뷔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브랜치 리키나 극보수주의 커미셔너의 죽음 등이 아닌 흑인 언론(인)이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흑인 스포츠 기자들이 쏟아낸 컬럼이나 기사 등을 통해서 '메이저리그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미국 야구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로서 일반에 인식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언급한 '잭 파웰의 사건'을 통해서 흑인 언론의 영향력이 흑인 사회뿐만이 아니라 백인 사회에로까지 확대되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흑백 분리주의를 고수하는 메이저리그를 압박하였다. 그러한 기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존재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 - 즉, J. G. 테일러 스핑크 어워드를1993년에 수상한 웬델 스미스이다.

1938년에 피츠버그 커리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웬델 스미스는 대학 시절에는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진 투수였다. 그런 그가 야구 선수가 아닌 기자로 인생을 바꾼 것은 역시 인종 차별 때문이었다. 1937년에 결승전에서 1 : 0 완봉승을 거두는 그의 뛰어난 활약 속에 그가 속한 팀은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그 경기를 관전한 타이거스의 스카우터는 그와 배터리를 이루었던 마이크 트레쉬와 그와 맞상대를 펼쳤던 투수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웬델 스미스는 그 스카우터로부터 "정말 계약을 체결하고 싶은 것은 바로 너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이전까지 야구계의 흑백 분리주의에 대해 큰 자각이 없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인종 차별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피부색으로 인해 메이저리그에 진입할 수 없는 현실을 깨기 위해서 스포츠 기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잭 파웰의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인 1938년 5월에 "왜 우리들(흑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면서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메이저리그)가 우리들의 참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메이저리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있다. 돈을 지불하는 것 만큼 우리들은 우리들과 같은 선수들이 필드에 나설 수 있도록 요구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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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44년에는 "미국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는 니그로라고 규정되어서,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니그로리그의 스타플레이어로서 멕시코리그에 진출한 윌리 웰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메이저리그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야구계의 일반적인 정책이 아닌 미국만의 차별적인 정책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 말은 백인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근본부터 부정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브랜치 리키나 빌 벅 등과 같은 진보적인 오너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가졌고, 브랜치 리키에게 재키 로빈슨이라는 존재를 소개한 것도 바로 그였다.

또한, 1997년 J. G. 테일러 스핑크 어워드를 수상한 샘 레이시도 1945년에 메이저리그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할 수 있는 인물로서 재키 로빈슨을 거론하면서, 그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는데 한 몫하였다. 이와 같이 흑인 스포츠 기자들이 집요할 정도로 메이저리그의 인종 차별 정책과 싸운 것은 정의감에 불타오른 것도 한 부분이지만, 자신들 역시 백인이 오너인 신문사에서는 일할 수 없었던 짐 크로우 법의 직접적인 희생자였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로서는 재키 로빈슨을 통해서 메이저리그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은 단순히 야구계만이 아닌 언론의 인종 차별도 허문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흑인 신문기자들이 많고 많은 선수 중에서 재키 로빈슨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결론적으로 재키 로빈슨이 당시로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흑인 엘리트였다는 점이었다. 즉, 개인적으로 재키 로빈슨의 학벌이 그를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로 만든 가장 중요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명문대 출신인 재키 로빈슨은 백인 사회에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고려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흑인 기자들도 흑인 이전에 기자라는 엘리트 의식을 근저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가 니그로리그를 몰락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 혹은, 니그로리그를 메이저리그와 대등한 존재로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뚜렷이 알 수 있다.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된 재키 로빈슨과 그런 상징을 만들어낸 인물들이 행한 큰 공적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메이저리그와 니그로리그의 대통합이 아닌 메이저리그의 흑백 분리주의 정책의 철폐라는 상징성에 매몰되면서, 오히려 야구판을 자본에 종속시키는 결과물을 낳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메이저리그라는 한정된 야구계로 본다면, 재키 로빈슨을 비롯한 그들의 도전은 위대한 업적이 될 수 있겠지만, 야구계 전체로 봤을 때에는 이미 마이너리그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등 확장일로에 있던 메이저리그의 지배 구조를 더욱 더 강화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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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주의를 벗어나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를 내세우는 21세기의 메이저리그의 전략 속에서 재키 로빈슨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단순히 메이저리그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것에만 그 의미를 두기에는 그의 데뷔 이후 쓰여진 역사의 무게가 너무 크게만 느껴진다. 재키 로빈슨의 역사적인 데뷔에 대한 재평가, 혹은 논의의 시작은 지금부터는 아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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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손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