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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노모 히데오를 시작으로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못해 눈이 멀정도입니다. 일본프로야구의 슈퍼스타였던 노모 히데오와 스즈키 이치로, 마츠이 히데키 등만이 아닌 그전까지 B급선수로 평가받던 신조 츠요시가 기대이상의 활약을 펼쳤던 것 등을 생각하면, 1985년 전성기가 지났다고 하지만 안티요미우리의 신적인 존재인 에나츠 유타카江夏 豊가 메이저리그에 도전해서 아깝게도 25인 로스터에 들지 못하면서 은퇴했던 일은 격세지감처럼 느껴집니다. 노모 히데오의 토네이도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일본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본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는 196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村上 雅則였습니다.

무라카미 마사노리는 1964년 9월 1일 샌프란시스코의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데뷔를 해서 1965년 시즌까지 2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2년간 54경기에 출장해서 5승 1패 9세이브를 거둔 중간계투진의 핵심이었습니다. 오잉 ... 단순한 패전처리나 잠깐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것이 아닌 팀에서 나름대로 활약하던 투수였는데, 왜 메이저리그 생활을 계속하지 못한 것일까? 나이나 부상 때문이었을까?

무라카미는 야구명문고 중의 하나인 호세대학 제2고교출신이지만, 고교시절에는 1년 선배인 시바타 이사오柴田 勳의 그늘에 가려서 큰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습니다. 투타에서 고교최정상급이었던 시바타가 활약한 당시의 호세대학 제2고교는 역대 최강의 고교팀 중의 하나로 손꼽힐만큼 막강한 전력이었습니다. 무라카미는 시바타가 졸업한 후 팀의 에이스로서 기대되었지만, 부상 등으로 제대로 던지지 못했고, 이전까지 5년 연속 코시엔대회출전을 자랑하던 팀도 그 숫자를 5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2학년 때인 1961년 봄 코시엔대회에서 구원투수로 1이닝을 던진 것이 전부인 무라카미였기에 어떤 프로구단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무라카미 자신도 대학에 진학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인 후에 프로에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츠루오카 카즈토감독의 눈에 띄어서 입단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대학진학을 고집하는 무라카미에게 난카이는 미국유학을 옵션으로 내걸었고, 결국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는 아니지만 마이너리그연수에 이끌려서 난카이 입단을 결정했습니다.

난카이의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맞이한 1963년 시즌에서 3경기에 출장해서 승패없이 2이닝을 던지면서 4.50의 방어율을 기록하면서 프로의 높은 벽을 경험했습니다. 1964년 입단 때의 약속인 미국유학을 요구했고, 다른 2명의 2군 유망주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산하의 싱글 A팀인 후레스노에서 기량을 연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라카미는 랜디 존슨과 같은 강속구투수가 아닌 커브와 스크류볼을 적절하게 사용한 기교파투수였습니다.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변화구로 무라카미는 11승 7패 방어율 1.78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캘리포니아리그에서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구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6월말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당시 스기우라와 노무라를 앞세운 난카이는 퍼시픽리그 정상을 다투고 있었기에 전력외적인 무라카미에 대해서 난카이구단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싱글 A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무라카미를 곧 바로 메이저리그로 불러서 8월 31일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9월 1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 구원투수로 등장해서 1이닝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깔끔하게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장식했습니다. 팀의 중간계투진의 일원으로서 의미있는 투구 속에서 9월 29일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스(현 애스트로스)전에서 동점상황인 9회말에 등판해서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메이저리그 첫승을 기록했습니다. 총 9경기에 출장해서 15이닝을 던지면서 1승 1세이브 방어율 1.80, 15탈삼진과 1사사구를 기록하면서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데뷔무대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즌을 기약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1965년도 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무라카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최초의 동양인 메이저리거를 향한 열렬한 환영이 아닌 난카이 호크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지리한 이중계약문제였습니다. 당초 난카이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산하의 마이너리그팀에 무라카미를 포함한 유망주들을 보내면서, [만약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1만달러에 샌프란시스코에 양도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는 무라카미가 아닌 난카이에 1만달러의 계약금을 보냈고, 무라카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무라카미가 메이저리그로 승격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난카이로서는 투수유망주를 앉아서 빼앗기게 되었기에 무라카미지키기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교묘한 언론플레이와 함께 무라카미의 부모를 앞세워서 무라카미를 설득했고, 결국 무라카미로부터 난카이에 잔류하겠다는 선언을 받아냈습니다.

난카이의 방해(?)공작이 성공하는듯 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자신들이야말로 무라카미와 정당하게 계약했으므로 계약위반이었기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일본프로야구에 항의서한을 보내는 등 무라카미를 둘러싼 문제가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습니다. 고심끝에 일본프로야구의 커미셔너는 [1965년만 무라카미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소속으로 경기장에 나서고, 1966년부터는 난카이소속으로 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지만, 자이언츠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리한 공방 속에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난카이로부터 1만달러를 돌려받는 선에서 절충안을 받아들였고, 무라카미는 마지막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계약문제로 1개월정도 늦게 합류했지만, 무라카미는 야구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습니다. 45경기에 출장해서 4승 1패 8세이브 방어율 3.75에 74와 1/3이닝 동안 85삼진을 잡아내는 등 맹활약을 했습니다. 역사적인 8월 15일 샌프란시스코는 [무라카미데이]라는 이벤트를 열면서 첫선발의 영광을 주었지만, 3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강판당하기도 했습니다.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무라카미는 2년동안 54경기에 출전해서 5승 1패 9세이브 방어율 3.43과 마시라는 애칭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중계약파동과 메이저리그에서의 활약 등으로 무라카미의 일본복귀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받았지만, 지나친 관심과 메이저리그에 대한 아쉬움으로 무라카미는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면서 6승 4패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1967년에도 3승 1패를 기록하면서, 그렇게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어가던 1968년 18승 4패 방어율 2.38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난카이의 새로운 에이스로 거듭 날 수 있었습니다.

1969년 7승 9패로 다소 부진했지만, 1970년 11승(11패), 1971년 14승(15패), 1972년 11승(9패)을 거두면서 3년연속 두자리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부상 등이 겹치면서 1973년과 1974년 대부진에 빠지자, 구단은 가차없이 센트럴리그의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시켰습니다. 한신에서 무라카미는 선발투수가 아닌 메이저리그 때처럼 중간계투로 변신을 꾀하였지만, 2승 1패 1세이브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기면서 다시 퍼시픽리그의 니혼햄으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니혼햄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첫해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지만, 2년째인 1977년 7승 4패 6세이브와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였고, 1978년 시즌에는 12승 11패 10세이브를 올리면서 다시 한번 재기의 날개짓을 펼쳤습니다.

1978년 시즌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세월에 따른 체력저하와 부상 등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내다가, 1982년 2경기에 2이닝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2년간을 뺀 18년간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면서 통산 103승(82패) 30세이브 방어율 3.64의 성적을 남겼습니다. 한시대를 풍미한 투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본프로야구에서 100승 이상을 거둠으로서 자신의 기량을 꽃 피운 투수 중의 한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퇴 후에 니혼햄을 시작으로 다이에, 세이부 등에서 코치로서 활동하거나 NHK에서 해설가로 땀냄새 풀풀 나는 유니폼은 벗었지만, 언제나 야구가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무라카미 마사노리의 미국에서의 성적
           무라카미 마사노리의 일본에서의 성적

야구선수가 아닌 야구인으로서 익숙해지던 2001년 무라카미가 선수로서 복귀를 했습니다. 일본프로야구의 정규리그가 아닌 마스터스리그의 토쿄 드림스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선 것입니다. 마스터스리그는 은퇴한 선수들이 정규시즌이 끝난 후에 돔구장이 있는 토쿄(토쿄 드림스 - 마스터스리그를 이끄는 자신들과 마찬가지인 중장년층에게 희망을 준다는 의미), 후쿠오카(후쿠오카 돈타쿠스 - 전국적으로 유명한 후쿠오카의 마쯔리 [돈타쿠]에서 유래), 오사카(오사카 로망스 - 꿈과 희망을 의미하는 로망에서 유래), 나고야(나고야 80D'sers - 오래간만입니다를 의미하는 나고야사투리인 [얏토카메]를 한자로 표기한 八十日目에서 유래), 삿뽀르(삿뽀르 앰비서스 - 삿뽀르 농학교의 초대교장이었던 클라크가 말한 [Boys, be ambitious]에서 유래)를 홈구장으로 한 5개 팀이 2001년부터 팀당 16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과거의 명선수들의 플레이를 통해서 중장년에게는 추억을, 청소년들에게는 꿈을 줌으로서 야구저변의 확대와 지역활성화의 목적 등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무라카미는 마스터스리그에서 2001년 3경기에 출전해서 2와 2/3이닝을 던지면서 1패와 40.50의 방어율을, 2002년에는 5경기에 출장해서 3과 1/3이닝을 던지면서 꿈의 1승과 5.40을, 2003년에는 3경기에 출장해서 3과 2/3이닝을 던지면서 1승과 함께 방어율 0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미일올스타전 2차전에서 시구를 하였고, 또한 앞으로도 던질 수 있을 때까지는 그의 모습을 야구장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구는 언제나 잘난 정치인이나 젊은 여자 가수들, 혹은 타종목의 선수들의 몫인 한국. 2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프로야구에서 선수는 한때의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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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손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