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강대국이지만 그에 비해 역사가 짧은 나라다. 그러다보니 미국에는 유럽의 오래된 나라들과 같은 '전통'이나 기념할 만한 것이 적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에릭 홉스봄이 지적했듯이 유럽 나라들이 오늘날 지키고 있는 전통이나 기념행사도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미국은 애초에 과거라는 것 자체가 없다보니 자연히 전통을 새롭게 창조하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모든 것을 꼼꼼하게 자료로 남기고,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또는 팔아먹을 수 있는- '전통'으로 만드는 일에 공을 들인다. 야구도 예외가 아니다.
아마 MLB를 관심있게 보는 팬이라면, MLB 선수들이 착용하는 유니폼이 시즌 중에도 수없이 바뀐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홈-원정 유니폼만 해도 3~4벌은 기본이고, 여기에 타격연습용 유니폼이나 스프링캠프용까지 더하면 유니폼 수는 팀에 따라서는 10종류에 이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일년 내내 이어지는 각종 기념 행사가 유니폼 가짓수를 더욱 늘려놓는다. 아일랜드 수호성인을 기리는 세인트 패트릭데이 (St. Patrick Day)에는 모든 선수들이 초록색 모자를 착용하고, MLB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을 기리는 날에는 팀에 따라서는 전 선수가 42번(재키 로빈슨의 등번호)을 달고 뛰기도 한다. 또한 민권운동 기념 경기(Civil-Rights Game)도 있어서 이날은 지정된 경기를 벌이는 양 팀의 선수들이 특별 제작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한다. 올해는 유색인 감독이 사령탑으로 있는 메츠와 화이트삭스가 이 경기를 지난 3월에 치른바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메이저리그에는 일년에 두어 차례, 거의 모든 구단이 옛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하는 복고 유니폼(Throwback Jersey)의 날이 있다. 이 날은 단지 홈 팀만이 아니라 원정팀까지 양 팀이 모두 자신들 프랜차이즈의 옛 유니폼을 착용한다. 가령 휴스턴이 80년대 입던 무지개 유니폼을 입으면, 상대인 피츠버그 역시 일명 '꿀벌' 유니폼으로 불리던 같은 시대의 유니폼을 입는 식이다. 이런 행사는 새로운 MLB의 팬들에게는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흥미를 안겨주고, 나이 지긋한 팬들에게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런 행사가 많은 호응을 받자 클리블랜드나 필라델피아 같은 경우에는 아예 올시즌 새로운 얼트 저지를 복고풍 디자인으로 제작했을 정도다. 토론토 역시도 과거의 스머프 유니폼을 복각해서 올시즌 정해진 날에 착용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벤트가 단지 한두 구단만이 하는 일회성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모든 구단들이 참여하는 야구팬 모두의 행사로 치러진다는 점이다. 사실 MLB는 구단들의 연고지 이전이 상당히 잦은 편이다. 가령 애틀랜타의 경우 과거에는 밀워키 지역에 연고를 둔 팀이었고, 다저스와 자이언츠 역시 본래는 뉴욕에 근거지를 둔 구단이었다. 텍사스 레인저스 역시 전신은 '워싱턴 세네터스'였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필라델피아와 캔자스시티를 연고지로 거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두 구단이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연고지에 있던 옛 구단의 유니폼을 입는 행사를 한다면, 아마도 현재 남아있는 해당 구단이나 올드 팬들의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MLB는 이런 복잡한 이해관계와 전통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예 이를 MLB 전체가 행하는 행사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플로리다처럼 정말로 역사가 짧은 -기념할 것이 없는- 팀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구단이 여기에 참여하며, 당연히 '나와바리'를 둘러싼 논란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는다. 구단들도 자신들의 연고지에 있던 옛 구단이라도 현재 다른 팀이 프랜차이즈를 이어받은 경우에는 해당 팀의 유니폼은 착용하지 않음으로서 문제의 소지를 피하는 모습이다.
옛 시애틀 연고 구단이었던 시애틀 파일러츠(Seattle Pilots)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한 이치로. (사진출처 : MLB.com)
물론 예외는 있다. 가령 매리너스가 자신들 연고지의 옛 구단인 시애틀 파일러츠(Pilots)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것과 같은 경우가 그 예다. 필로츠는 1969년 시애틀에서 창단한 뒤 1년만에 밀워키로 건너가 구단명을 '브루어스(Brewers)로 바꾸면서 현재의 밀워키가 된 팀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문제의 소지는 없다. 이미 40년이 지난 사건이고 밀워키 구단이나 팬들 누구도 자신들이 파일러츠와 연관되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옛 파일러츠 관계자들 역시도 시애틀 구단이 개최한 행사에 흔쾌히 참가해서 억울하게 야구단을 빼앗겼던 시애틀 올드 팬들의 아픔을 달래주는 모습이다.
한국프로야구도 근래 들어 MLB와 같은 옛 유니폼 입기 행사가 자주 열리는 모습이다. 가령 두산이 OB 시절 유니폼을 입는 행사라던가, 롯데가 하늘색 옛 유니폼을 착용하는 것과 같은 행사가 대표적이다. 이런 이벤트는 사실 SK 와이번스가 삼미와 옛 인천아마팀의 유니폼을 입으면서 시작된 것인데, 올드팬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한국야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간 팬들이 누릴만한 추억이나 역사의 보존에 너무도 무심했던 한국야구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점도 보인다. 가령 모기업 이름이 바뀌면서 모자와 유니폼에 'OB'라는 글자를 새겨넣을 수 없었던 베어스의 경우처럼, 한국야구는 그간 지역연고보다 기업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유니폼 행사를 하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LG 트윈스가 MBC 청룡의 유니폼을 입고, 기아 타이거즈가 해태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한 뒤 이를 팬들에게 판매하는 식으로 완벽한 '팬서비스'를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런 행사가 모든 프로야구 팀과 팬들이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팬서비스에 민감한 일부 구단들만이 시행한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가령 지난 삼성-롯데전에서 최신식 유니폼을 입은 삼성과 스머프 옷을 착용한 롯데 선수들이 공존하는 모습은 어색하게 보였다.
창단과 함께 연고를 인천으로 옮긴 SK의 경우는 또다른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다가오는 5월 3일에서 5일까지 SK 와이번스는 옛 태평양 돌핀스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태평양 데이' 행사를 열 예정이다. 연고지 팀으로부터 어이없이 배반당한 인천 팬들의 설움을 달래준다는 행사 취지는 좋다. 또한 태평양 기업과 협의 하에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유니폼에 새기기로 한 것도 SK의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경기에 상대하는 팀이 하필이면 우리담배 히어로즈이고 그 팀의 주축 선수가 태평양에서 데뷔해 한번도 팀을 옮기지 않은 이숭용이라는 것은 이 행사의 큰 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인천 연고일 뿐 태평양과는 아무런 연결성이 없는 SK가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동안, 정작 태평양의 빛나는 순간을 이끌었던 이숭용이나 정명원, 장광호, 김성갑 코치 같은 이들은 벤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관련자들이 모두 무대에서 물러난 뒤에 옛 파일러츠 유니폼을 착용한 시애틀의 경우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또한 시애틀의 경우에는 파일러츠 소속이던 많은 스타들을 불러들여 성대한 기념 행사를 열었지만, SK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태평양 출신들이 현대 또는 우리담배와 관련을 맺고 있기에 '완전한' 형태로 행사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물론 은퇴한 최창호가 시구를 맡을 예정이기는 하지만). 단지 유니폼만 입을 뿐 진정한 태평양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반쪽짜리 행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SK 역시 창단 과정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와 전주라는 프랜차이즈를 '제거'한 역사가 있다. 비록 SK측은 쌍방울과의 관련성을 부정할지 모르지만, SK의 창단 멤버 대부분이 쌍방울 선수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쌍방울 팬들이 응원할 팀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단지 SK 구단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 추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야구 전체,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숭례문과 동대문구장의 사례를 보라). 부끄러운 역사이건 원치 않는 역사이건, 그것을 보존하고 잘 가꾸어서 훗날에 다시 추억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면에서 한국야구는 지극히 취약한 면이 있다.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을 버리고 수원으로 옮긴 사태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고, 이는 SK의 태평양 데이를 둘러싼 논란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나는 SK더러 쌍방울의 역사를 보존하고 기념하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다. 그들이 주장하듯, 지금의 SK는 쌍방울과는 전혀 무관한 구단이며 당연히 쌍방울을 기념할만한 어떠한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마찬가지 이유에서 SK에게 태평양을 기념하거나 추억할 만한 어떤 권리도 없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비록 상당수 인천 팬들이 호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태평양이나 쌍방울의 역사는 현대-SK 두 구단이 '해체 뒤 창단'이란 형태를 취하면서 구단들의 손을 떠난 상태다. 태평양 유니폼을 착용할 권리는 더이상 국내의 어느 구단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견해일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죽기 전에 태평양 경기를 한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아무런 바랄 것이 없다는, 추억을 빼앗기고 너무나도 사랑하던 상대를 잃어버린 인천 팬들의 한을 달래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SK가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태평양 데이'는 그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문제는 MLB의 경우가 그렇듯이 한국프로야구 전체가 대승적으로 합의하고 팬들을 위한 행사로서 제도화함으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한두 구단만의 일회성 행사가 아닌, 모든 야구팬이 공감하고 함께 추억을 나눌 수 있는 한국야구 전체의 행사로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의 근원이 역사와 전통을 헌신짝처럼 여긴 KBO와 구단들에게 있는 만큼, 해결 역시도 야구계 전체가 중지를 모아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구단들이 옛 유니폼을 입고 올드스타들을 불러들이는 무대가 조성된다면, SK 역시 아무런 부담없이 옛 인천 연고팀들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 것이고 옛 스타들을 초대해서 팬들과 함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상대편 선수인 이숭용 등을 초대해서 함께 향수를 나누는 형태로 치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금은... 현대유니콘스에 대한 인천팬들의 한풀이로 여겨질 소지가 충분해 보인다.
SK 와이번스는 창단 뒤 끝없는 노력과 앞서가는 시도로 한국프로야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온, 앞으로 명문구단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팀이다. 특히 인천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프런트의 다양한 시도와 어느 구단도 시도한 적이 없는 독창적인 팬서비스는 다른 구단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점이다. 하지만 이번의 태평양 데이 이벤트는, SK측이 홈페이지 공지에서 취지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여러모로 부적절하고 성급한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SK가 창단한지 이제 겨우 8년째다. 그동안 우승도 했고, 팬들의 사랑도 얻어냈으며, 한국프로스포츠사에 오래도록 남을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 누가 뭐라고 해도 현재 인천을 대표하는 팀은 SK 와이번스다. 그렇다면 조급하게 인천야구의 '만들어진 전통'을 새기기보다는, SK로서의 새로운 역사를 좀 더 오랜 시간동안 가꿔 나가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SK가 조금 더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도록 주문하고 싶다.
부연. 일부 SK팬들이 지금 한 야구기자의 블로그에서 하고 있는 행태는 자신들이 응원하는 구단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이 글은 미디어다음 해외야구에 기고한 원문입니다.
'기호태의 Baseballog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힘을 내요 배리 지토 (11) | 2008/05/14 |
|---|---|
| 트레이드를 비난하기에 앞서 생각해볼 것들 (7) | 2008/05/06 |
| 태평양 데이 논란과 MLB (16) | 2008/04/30 |
| 플로리다-우리담배 돌풍, 반가워할 일인가 (16) | 2008/04/22 |
| 수비형 포수는 없다 (16) | 2008/04/08 |
| 워싱턴에 야구장이 생긴 날 (7) | 2008/03/30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