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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을 통해서, 재키 로빈슨이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던 메이저리그 내부의 변화 - 예를 들면, 완고한 극보수주의 커미셔너인 케네소 랜디스 체제의 종언과 니그로리그의 급성장에 대한 위기 의식, 그리고 메이저리그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한 흑인 언론의 역할 등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 배경 중에서 가장 큰 요소는 한국에는 별로 소개되지 않았던 흑인 언론을 비롯한 흑인 사회의 대항이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 메이저리그판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한국에서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서 데뷔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흑인들이 백인들과 함께 U.S.Army로 참전한 것만을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도 흑인 사회의 대항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순히 U. S. Army라는 마크를 달고 흑인과 백인이 함께 싸운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내부적인 변혁의 힘을 거세, 혹은 무시하는 부당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카 안과 밖을 향한 '더블 V'

흑인 사회 내부의 눈으로 봤을 때에 '제2차 세계대전'은 모순된 전쟁이었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게 있어서, 독일이나 이탈리아, 일본과 미국은 차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같은 파쇼였다. 나치 독일 등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미국이었지만, 자국 내에서는 흑인 등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공식적으로 합법적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게르만 우월주의와 종이 한장 차이도 없는 앵글로 색슨만의 세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성조기 아래에서 대동단결을 강조했지만,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였다.

그런데, 흑인 사회 내부도 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미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등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차별 정책을 이유로 베를린 올림픽 보이코트를 주장하였고, 또한 이탈리아가 아프리카 유일의 독립국인 에디오피아를 침공하였을 때에도 이탈리아에 대한 차관 등의 지원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는 등 전쟁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던 흑인 사회로서는 무조건적인 참전을 선언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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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력한 흑인 지도자였던 두 보이스는 전시 중에는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한 항의를 중지하고, 정부의 정책에 무조건적인 협력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그 공로로서 흑인의 지위 향상을 기대한 이 주장은 흑인 사회 내부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고, 또한 실제로 전쟁이 끝났을 때에 군수산업 등에서 일하고 있던 흑인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통지서였다. 실제로, 전쟁특수로 1940년 4월부터 8월까지 백인의 실업율이 17.7%에서 14%로 개선된 것에 비해서, 흑인은 0.1%정도가 감소한 수준이었다. 즉, 흑인 사회로서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유로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을 중지하고, 오로지 전시체제에 협력할 수는 없었다.

결국, 흑인 사회는 전쟁에 협력하지만,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한 투쟁도 멈추지 않는다는 절충안을 도출해냈고, 흑인 유력지인 피츠버그 커리어는 '아메리카 안팎에서의 승리'를 내건 "더블 V"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피츠버그 커리어의 라이벌인 시카고 디펜더도 "더블 V"만 내세우지 않았을 뿐 "국가의 역사에 사활이 걸린 지금 현재, 아메리카 아프리칸의 마음은 이 나라의 다른 시민들과 똑같다. 하지만,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 것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한다고 해도, 우리들은 과거에 배신당했던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은 민주주의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미국 정부에 대해서, 우리 흑인에게도 똑같은 민주주의가 주어지기를 요구한다."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전인 1941년 10월에 주장하였다.

이러한 흑인 사회의 노력과 함께 완전한 임전태세를 갖추려고 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도가 맞아떨어지면서, 마침내 1940년 9월 27일에 필립 랜돌프, 월터 화이트, 아놀드 힐 등 흑인 지도자들은 대통령과 직접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흑인 지도자들은 전시 중에 흑인 차별 폐지 운동의 중지할 것을 요구에는 반대하였고, 그 대신에 군대에서의 흑백 분리 정책의 폐지와 군수산업에서 고용 차별을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정부는 육군 준장과 고용국에 처음으로 흑인을 임명하였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실례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린 1941년 10월에도 군수공장의 50% 이상이 흑인을 고용하지 않았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 내는 것이다

흑백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흑인 자신이 노력할 필요가 있고, 정부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흑인 사회의 일치단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필립 랜돌프는 1941년 1월 15일 "워싱턴에서의 10만명 대행진"을 할 것을 흑인 사회 전체에 제안하였다. 이 대행진의 목적은 "충성스러운 아메리카 아프리칸은 나라를 위해 싸우고, 일할 권리가 있다"는 단순명쾌한 것이었다. 이 주장에 보수적인 NAACP 등 흑인 사회 전체가 동의하였다. 결국, 전쟁체제의 완비와 정치적인 부담을 타개하기 위해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41년 6월 18일 대통령 행정 명령 8802호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군수산업과 정부기관에서 노동자를 고용할 때, 인종, 신념, 피부색, 출신국의 차이를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된다. 모든 노동자를 이러한 산업에 참가시키는 것은 고용주 및 노동조합의 의무이다."고 선언하였고, 또한 이 명령에 위반이 있는지 없는지를 감시하고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 행정명령으로 인종차별이 일거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흑인 고용을 방해한 파업이나 고용주의 거부 등에 대한 제소 등이 끊이지 않았고,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1943년 6월에는 디트로이트에서 대규모의 흑인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행정명령이 전시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그 대응책으로 내려진 조치였고, 실질적으로 실효성이 불완전하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인종 차별 정책의 폐지를 향한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12월에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한 위원회를 발족하였고, 1948년에는 대통령 행정명령 9981호를 통해서, 군대 내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시켰다. 이 조치로 한국전쟁에서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백이 분리되지 않은 군대'가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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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은 메이저리그에도 암운이 드리워졌다. 테드 윌리엄스, 밥 펠러, 조 디마지오, 스탠 뮤지얼 등 각 팀의 슈퍼스타들이 징병되었고, 전시체제를 이유로 리그가 중단될 가능성이 고조되었다. 그런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는데는 야구 이상이 없다고 생각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메이저리그의 경기가 전쟁 중에도 계속될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 한편, 전쟁터에서 흑인과 전우애를 나눈 메이저리거들은 흑백 분리 정책을 고수하는 메이저리그에 대해서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또한, 흑백 차별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선수와 팬들 사이에 퍼지면서, 메이저리그도 흑인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점점 직면하였다.

그리고, 정치계에서도 흑백 차별에 따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급작스러운 흑백 차별의 폐지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내셔널 패스타임'인 메이저리그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케네소 랜디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커미셔너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알버트 챈들러가 선임되었다. 즉, 재키 로빈슨이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로 데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메이저리그가 자신들이 고수하고 있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성의 결과가 아니라, 흑백 차별 폐지를 향한 흑인 사회의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또한, 흑백 분리 정책은 메이저리그에게 부여된 사회적인 목적인 사회적인 통합의 장으로서의 기능과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적인 존재인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이율배반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에 대해서 오너들이 15 : 1로 반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메이저리그가 자체적으로 개혁을 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흑인 파워의 성장에 따른 정치계의 압력 등 지금까지 살펴본 제 요소들이 갖추어지면서, 마침내 1945년 4월 15일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인 재키 로빈슨이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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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손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