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우연히 케이블 TV를 통해서 [워터보이즈]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영화 [워터보이즈]는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여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고 있는 수중 발레에 남자 고딩들이 도전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한 때 금녀라는 불문율이 지배하고 있던 스포츠에 문호가 개방되면서 지금 현재는 여성들도 즐기는 스포츠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여전히 이것은 남자들만의 운동, 혹은 저것은 여자들만이 하는 경기라는 선입관이 존재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 봐도 동네 야구를 할 때에 인원이 부족해도 여자 아이들은 절대 끼워 주지 않았고, 여자 아이들도 억지로 같이 하고 싶다고 생떼를 부린 적이 없었다. 체육 시간에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는 동시에 별로 돈도 들지 않았던 축구에도 선생님의 강권이 없어면 함께 하려는 여자 아이는 정말 드물었다. 대신에 여자 아이들은 열띤 응원의 몫만 주어졌다. 복싱과 레슬링 등에도 여성들이 진출한 지금 시대를 생각하면 사회적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일전에 아는 분의 따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박세리와 같은 세계적인 골프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여성이라고 하면 스포츠를 싫어하거나 구경꾼으로서 - 그것도 남자 선수의 잘생긴 얼굴이나 매끈한 몸에 열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자신들도 적극적으로 스포츠를 즐긴다는 사실에 대견스러움을 넘어서 스포츠가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인류가 즐기게 된 것이 너할나위 없이 기뻤다. 물론 여성들이 스포츠를 싫어한다는 것은 하나의 고정 관념이며, 언제나 구경꾼으로서의 입장에 질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무명의 용사였던 감사용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세인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한 사회인 야구 출신으로 음지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뒤늦게 재조명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회인 야구, 혹은 중 고교(대학)에서 야구를 업으로 삼은 전문 야구 선수가 아니면 프로 야구단에 진출하는 것은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
1982년에 한국 프로야구가 갓 출범했을 때에도 실업 야구 등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야구 엘리트들의 잔치였다.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의 참가와 프로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선수 자원이 부족했기에, 감사용은 좌완이라는 잇점으로 최약체이지만 프로 구단인 슈퍼스타즈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감사용이 은퇴한 이후로는 프로야구는 오로지 학교에서 생산된 야구 기계들만의 경합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이아몬드로 간 단거리의 신화
1983년에 롯데 자이언츠는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의 주축 선수들이었던 최동원과 심재원, 유두열, 박영태 등의 입단으로 기대에 부풀었지만, 최동원이 9승에 머무는 등 부진을 보인 끝에 전후기를 합쳐서 43승 56패 1무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후 자이언츠는 1984년을 대비해서 대대적으로 팀을 정비하였다. 슈퍼스타즈와의 트레이드를 통해서 최동원을 받쳐 줄 임호균 등을 영입하였고, 일본인 코치인 도위창을 수석 코치로 임명해서 감독인 강병철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도위창은 프로가 출범하기 이전인 실업시절의 롯데에서 코치를 하는 등 자이언츠의 고위층 인사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도위창은 언제나 수석 코치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감독으로서 팀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구단 내 파워가 감독 이상이었다. 자이언츠가 1984년에 한국 시리즈를 제패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지도 체계의 혼선도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던 1984년을 대비한 전력 보강의 백미는 서말구의 영입이었다. 서말구는 1979년에 100m 한국 최고 기록인 10초 34를 세우는 등 한국 단거리의 신화와 같은 존재였다. 장재근 이전에 한국 육상계를 대표하던 서말구가 그것도 단순히 주루 코치 등이 아닌 선수 겸 코치로 영입되었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더 컸다. 그의 빠른 발이라면 번트를 대고 무조건 1루로 달리면 내야 안타라던지, 대주자로 출전하면 3루까지는 도루로 기본 사양이라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래서, 대도로 유명한 김일권과 이해창, 김재박 등과 야구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서말구가 도루왕을 놓고서 피할 수 없는 경쟁에 관심이 모아졌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야구에서의 도루는 100m 달리기와는 달리 타이밍 등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었지만,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져서 그 공을 다시 포수가 2루에 던지는데 몇 초 걸리는데 서말구가 1루에서 2루까지 뛰는데 몇 초 걸린다는 식으로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야기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말구가 실제로 경기에 투입된 적은 없었고, 데주자 등으로 출전했다고 해도 기대한 도루 등을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 어린이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던 보물섬에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었던 허영만의 [제7구단]에서 가공할 타격을 자랑하는 고릴라인 미스터 고에 대항해서, 상대팀들이 치타와 독수리 등이 등장한 것도 서말구에서 모티브를 얻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서말구는 자이언츠에서 3년간 선수겸 코치로 활동하였다. 선수로 기용되지는 못했지만, 선수단의 체력훈련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해태 타이거즈도 1984년부터 1996년까지 12년동안 조선대 체육학과 교수이던 김응식을 동계훈련 기간 동안에 초빙해서 체력훈련을 전담시키기도 하였다. 선수층이 두텁지 않던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 신화를 만들 수 있었던 한 요인이 김응식의 체계적인 체력 훈련에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심판도 그렇고 야구계 전체(단장이라던지 대표 등의 구단 요직은 아직 아직이지만)가 전체적으로 선수 출신에게만 개방되고 있는 것은 지나친 순혈주의라고 생각한다. 세이버매트릭스의 대부로 레드삭스의 구단 보좌역을 맡고 있는 빌 제임스는 야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통계 학자였던 것처럼 한국 프로야구도 일반인이나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롯데 자이언츠가 일개 야구팬이었던 S에게 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긴 적도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단 상층부와의 학연 등에 따른 결과였을 뿐이다. 한국에서는 야구판 뿐만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국방부나 국정원 등에서 민간 전문가도 참여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을 종종 접할 수 있지만, 항상 구색맞추기나 여론무마용에 불과했다.
또한, KBO의 사무총장은 야구인이 되어야 한다던지 하는 이야기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의 한국에서 야구 선수가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대한 비전을 보이거나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머니볼의 빌리 빈도 선수 출신이지만,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고 있는 것이 한국 야구의 현주소라고 생각한다.
고교를 졸업한 후에 바로 프로에 입단한 선수들의 학력도 대부분 대졸이다. 그들이 대학에 간 이유는 우수한 지도자가 되기 위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은퇴 후에 프런트에서 업무를 맡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병역을 연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학이 필요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지만 우수한 인력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에 - 야구판에 한정해서 - 야구에 대한 어떤 비젼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솔직히 지금 현재 야구판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어떠한 비젼을 가지고 있는지 ... ...
한국판 [그들만의 리그]
1999년에 있었던 대통령배의 준결승전이었던 덕수정보고와 배명고의 경기는 한국야구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덕수상고의 선발투수로 나서서 공 3개를 던지고서는 마운드를 내려 온 한 선수로 인해 이 경기는 한국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한국 최초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여성인 안향미이다.
안향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그동안 금녀의 벽으로만 여겨져 온 야구에 도전하였다. 중학교를 거쳐서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교육청의 특기생 규정 때문에 특기생으로 진학할 수 없는 현실을 좌절하지 않고, 오랜 설득 끝에 여자 특기생 종목에 야구를 포함시키는 성과를 얻으면서 그는 덕수정보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규정 변경으로 KBO는 [의학적으로 남자가 아닌 자는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을 삭제하는 등 형식적이지만 여성도 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학 진학을 위한 감독의 배려 속에 꿈에 그리던 공식 경기의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배려는 그에 대한 특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남녀차별에 대한 오랜 싸움 끝에 얻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원래 1루수였지만, 아무도 그와 함께 플레이를 펼치려고 하지 않아서, 혼자서 연습할 수 있는 투수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고학령으로 올라 갈수록 점점 차이가 나는 파워의 격차도 무시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그리고, 어렵게 고교에 진학 후에는 여자가 야구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 모감독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다고 한다. 야구를 포기 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혹독한 훈련을 시킨다던지, 지방의 연습 경기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던지, 여자는 부정탄다고 고사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벤치에도 앉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특기생 자격을 손에 넣었지만, 그에게 오라는 대학(상명대 체육학부의 특기생이 되었지만 이 대학에는 야구부가 없음)이 없어서 진학을 포기하고, 그는 프로 구단의 테스트에도 참가했지만, 모두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끝없는 편견 속에 좌절만을 경험하던 그에게 미국의 여자팀으로부터 입단 제의가 오면서 한줄기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학생 시절에 영화 [그들만의 리그]를 보면서 외국진출을 꿈꾸어 왔기에, 그로서는 한마디로 고진감래라고 생각했지만, 비자 문제로 미국 진출이 물거품이 되면서 계속되는 좌절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깊은 상심에 빠져있던 안향미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일본의 여자 야구팀인 드림윙스에 입단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3루수와 투수로서 활동하던 그는 2004년 3월에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최초의 여자야구단인 [비밀리에]를 창단하였다. [비밀리에]라는 이름을 처음에 들었을 때에는 [여자이기 때문에 몰래 야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표현]한 것인 줄 알았는데, [Baseball is my life(야구는 내 인생)]의 앞글자인 BIML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저 역시도 여성이 야구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창단 4개월 동안 손발을 맞춘 비밀리에는 제4회 여자 야구 세계대회에 자비를 털어서 참가하지만, 홍콩에 6대 16, 일본에 0대 53, 캐다나에 0대 27로 완패를 당하였다. 하지만, 짧은 훈련 시간 속에서도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의 언론들은 처음에는 대패라던지 졸전이라던지 지랄염병을 하다가, 사람들의 폭발적인 성원에 언론 특유의 말뒤집기 신공을 펼쳐서 [비밀리에]에 대해 감동적이었다던지 스포츠정신을 잘 보여주었다는 식의 호평이 더해지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비밀리에]의 유쾌한 반란(?)이 있었지만, 세계 대회에 참가한 것을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되는 등 한국 사회의 편견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 이상의 은메달이라는 구호 아래에 여자 핸드볼팀이 화제를 모았지만, 이런 식의 일회성적인 관심은 매번 올림픽 등 국제 대회 때마다 있어 왔던 일이다.
비밀리에 이후로 나인빅스나 레드와인스 등과 대학팀이 창단되는 등 여성 야구도 저변이 확대되었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져만 갔다. 영화 속의 [그들만의 리그]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해체되었듯이 한국 여성 야구의 원조격인 [비밀리에]도 내분을 겪은 끝에 2006년에는 발전적으로 해체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야구에 대한 끝없는 정열을 가진 여성들이 하나 둘 야구를 시작하는 등 2007년에는 소리 소문 없이 여성 야구팀이 20개 팀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7년 3월 7일에는 한국 여자 야구 연맹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고, 6월 2일부터 열린 제1회 KBO 총재배 전국 여자 야구 대회는 전국의 18개 여자 야구팀이 참가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열리기도 하였다.
안향미라는 개인이 밀알이 되어서, 여자 야구는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비밀리에]의 유쾌한 반란이 - 발전적인 해체이지만 - 해체되었듯이, 여자 야구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여자 야구의 가장 큰 장점은 그들은 야구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금녀의 편견 속에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열정은 여자 야구라는 좁은 틀이 아닌 야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 야구의 미래가 어떻게 되던 개인적으로 보는 스포츠가 아닌 하는 스포츠로서 야구를 실천하고 있는 그들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야구는 보는 것도 읽는 것도 분석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아닌 직접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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