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한국에도 프로야구라는 것이 출범했을 때에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는 삼성 라이온즈였습니다. 황규봉과 이선희라는 확실한 좌우 에이스와 성낙수, 권영호 등의 투수진에 함학수, 정현발, 허규옥, 장태수, 이만수 등의 타선은 다른 5개구단을 압도하는 전력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마이너리그 출신인 박철순을 앞세운 OB 베어스가 예상 외로 탄탄한 전력을 발휘하면서 원년우승을 이루어냈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나고 최동원, 김시진, 장효조, 김재박 등 아마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1983년부터 프로야구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구단간 전력의 불균형이 심했는데,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을 우려해서 KBO는 재일동포선수들의 영입을 앞당겨서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약체인 삼미 슈퍼스타즈에 히로시마 카프 등에서 다년간 활약한 장명부와 2군 타격 2위를 한 이영구가, 큰 전력 보강이 없었던 해태 타이거즈는 주동식과 김무종을 영입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에이스의 부재를 느끼던 MBC는 일본과 미국 마이너리그 등에서 활동했던 이원국을 영입해서, 기존의 박철순(OB)과 국가대표출신의 최동원(롯데), 김시진(삼성) 등이 어우러지면서 구단간 격차를 줄이려고 했습니다.
기대와 우려 속에 투입된 재일동포선수들은 30승을 올린 장명부와 이영구, 주동식, 김무종 등이 토종선수에 비해서 한단계 위의 실력을 보여 줌으로서, 1984년에는 각 구단마다 우수한 재일동포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 경쟁을 펼쳤습니다.
롯데는 일본 롯데 오리온즈를 통해서 홍문종과 박덕용을 영입하였습니다. 홍문종은 1984년 롯데 돌풍의 주역이었기에 야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지만, 박덕용이라는 이름은 매우 생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박덕용은 1984년 총 6게임에 나와서 1승 2패를 거두었습니다. 총 투구이닝이 19이닝으로 선발보다는 중간계투로 가끔 나섰고, 방어율도 5점대였습니다. 일본에서 건너온 선수치고는 전혀 팀에 보탬이 안되는 성적이었습니다. 박덕용은 일본에서도 1군 경험은 전혀 없었고, 한국에서 거둔 성적만으로도 짠돌이 구단이 형편 없는 투수를 데리고 왔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1975년에 효고켄에 있는 이쿠에이 育英고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상당한 유망주였습니다. 드래프트에서 박덕용은 1순위(전체 6위)로 롯데 오리온즈에 입단했습니다. 당시에는 150Km를 찍을 수 있는 강한 어깨를 가진 좌완 정통파 유망주였지만, 입단 첫해부터 어깨 부상으로, 1군 무대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롯데 오리온즈에서 5년동안 2군 생활을 한 그는 1980년에는 세이부 라이온즈로, 1981년부터는 킨테츠 버팔로스에서 오로지 2군에서만 활동하였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그는 현해탄을 건너서 부산으로 날아왔던 것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바란 것은 금전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프로에 들어온 이상 1군 무대에 한번이라도 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박덕용이 한국에 온 것은 1984년이 처음이 아니라 두번째였습니다. 1977년 일본 롯데 오리온즈 소속일 때 그는 임대 형식으로 실업팀 롯데에서 6개월 정도 활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고질적인 어깨 부상으로 1게임밖에 던지지 못했지만, 당시 실업의 강호였던 한일은행과의 경기에서 당시 한일은행의 4번타자였던 김용철에게 홈런을 허용해서 완봉승 대신에 완투승을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에는 일본에서의 야구생활에 미련이 있었고, 또한 자신이 원해서 한국에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돌아가서 일본에서 야구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어를 특별히 배울 생각도 없었고, 다시 한국에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재일동포 선수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이 한국행을 선택한 이유는 대부분 돈벌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거나 미래(1군)가 보이지 않아서 한국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한국에 가면 1군에서 플레이할 수는 있다는 것은 박봉에 2군에서만 활동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박덕용은 6월 19일 전기리그 최종전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에서 6이닝 2실점으로 첫 승리이자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성격이 좋아서 팀 동료들과 사이가 좋았던 박덕용이었기에 그의 승리를 위해서 다른 선수들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습니다. 홍문종도 동병상련의 처지로 출전을 하지 못하던 박덕용을 위해서 투런홈런을 치는 등 그의 승리에 일조를 하였습니다.
1975년 프로에 뛰어던 이래 1군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였습니다. 그 1승이 마지막이 되었고, 또한 1984년을 끝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 깊은 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덕용의 통산성적
박덕용을 비롯한 한국에서 활동한 적지 않은 수의 재일동포선수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말할 줄 모르거나, 말할 줄 안다고 해도 부정확한 발음과 단편적인 언어구사에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피부로 느끼는 그들이 사소한 차이를 보였을 때에 돌아 온 것은, 같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을 토로하는 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반쪽바리]일 것입니다.
한반도가 이념에 의해서 남북으로 갈라져서 냉전의 상징이 된 것처럼, 일본의 재일동포사회도 재일 한국인(민단)과 재일 조선인(조총련)으로 나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에서 민족교육과 한국/조선어 교육에 가장 열성적인 쪽은 조총련계입니다. 자신들을 대표하는 단체는 한반도가 나뉜 것처럼 양분되었지만, 인간 자체의 나뉨을 가져 오지는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총련계던 민단계던 관계없이 같이 차별받고 있는 같은 민족이란 의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정적으로 친일파들을 단호하게 청산한 북한(정식 명칭을 사용하면 국가보물법에 저촉될 것 같아서 ... 쩌비~~!!)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한국에 온 많은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조작된 간첩이 되어서 차디 찬 감방에서 역설적으로 한국을 배웠습니다. 그런 한국에서 한국계 선수들이 국가보물법에 의해서 인간국보로 지정되는 영예를 받지 않고 한명의 낙오도 없이 무사귀환(?)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달픈 육체노동의 댓가를 현재의 이주 노동자처럼 떼이지 않고(약속어음이 부도난 경우는 있지만), 야만적인 검거작전이 아닌 자신들의 발로 한국을 떠날 수 있었고, 다른 선수들의 연봉보다도 더 많이 받는 그들이 [반 쪽바리]에 [야구 귀족]이라는 말도 듣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그들은 최초의 이주 노동자였으며, 야구 귀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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