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흔히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들을 수 있다. 이 말은 야구에서 투수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화끈한 타격전을 선호하는 야구팬들이 많지만, 라이벌 투수들끼리의 피말리는 투수전도 야구의 묘미 중의 하나이다. 한국 야구사에서도 경기를 지배하던 수많은 투수들이 있었다. 50~60년대의 전설적인 라이벌인 장태영과 김양중, 경북고의 전승시대를 이끈 임신근이나 남우식 등은 한국 야구사에 전설로 남아있다. 그리고, 1976년의 고교야구를 빛낸 트로이카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트로이카의 출현

1976년의 야구팬들은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오로지 세선수의 활약과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바로 그 세선수는 경남고의 최동원과 대구상고의 김시진, 군산상고의 김용남이었다. 은테 안경과 다이나믹한 투구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를 앞세운 최동원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해서 지금은 김시진이나 김용남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고교야구의 1인자를 놓고 펼친 세선수의 치열한 경쟁은 다시 보기 어려운 야구사의 라이벌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야구시즌을 알리는 첫대회인 대통령배에서는 김용남의 군산상고가 김시진이 이끈 대구상고를 1:0으로 꺽어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청룡기에서는 최동원이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면서 경남고를 결승에 진출시켰다. 김용남이 이끄는 군산상고와의 승자 결승에서 최동원은 2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였고, 최종 결승에서도 군산상고를 3:0으로 셧아웃시키면서, 최동원이라는 이름 섯자를 확실하게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고교 졸업 후, 최동원은 연세대로 김시진과 김용남은 한양대로 진학하였다. 고교 시절에 이어서 대학에서도 선의의 대결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지만, 김용남은 최동원과 김시진에 한발 뒤지는 성적을 남기면서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대학야구의 3인방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세선수의 라이벌전은 실업으로 이어졌다.

고교와 대학에서 다른 2명을 압도한 최동원은 당시 파격적인 액수를 받고 세미 프로라고 할 수 있던 롯데에 입단하였고, 김시진은 경리단으로, 김용남은 한국화장품으로 각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실업 야구에서도 최동원의 시대는 변함이 없었다. 1981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최동원은 매경기에 나서서 김시진이 이끈 경리단을 꺽고 팀을 우승시키면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김시진은 언제나 최동원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견실하고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강력한 이미지를 야구팬들에게 심어주지 못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프로에 진출한 후에도 1984년의 한국시리즈에서 실업 시절에 이어서 또 다시 최동원의 원맨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픔은 아마도 타인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지도자로서 현대 유니콘스를 철벽 마운드로 만드는 등 코치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또한 삼인 중에서 유일하게 프로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다.

반면에, 김용남은 원년부터 타이거스에 입단해서 팀의 에이스로서, 각종 투수 부분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의 명성에는 훨씬 못미치는 활약이었다. 세계선수권대회로 인해 원년 프로야구에는 참가하지 못했던 최동원과 김시진이 입단해서 거둔 성적들과 비교하면, 한 때 트로이카라고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차이를 보였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던 타이거스는 1983년에 MBC 청룡을 꺽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였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김용남이 아닌 이상윤이었다. 그리고, 문희수, 선동열, 차동철, 김정수, 신동수 등이 차례로 입단하면서, 1985년에 11승을 거둔 것을 끝으로 마운드에는 그가 설 자리가 사라졌다. 결국, 타이거스를 떠나서 이글스에서 개인 통산 50승이라는 - 다른 선수들의 100승, 200승 등에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지만 - 을 달성하는 등 통산 52승 50패의 성적만을 남기고 정든 유니폼을 벗었다.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그는 이글스와 레이더스의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마야구가 프로출신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후에는 모교인 군산상고의 감독이 된 그는 역전의 명수를 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시진과 김용남으로서는 최동원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이 불운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나름대로 고교와 대학, 실업, 그리고 프로에서 계속해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벌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이유도 고교시절의 트로이카로서 부각을 받았기 때문은 아닐지 싶다. 또한, 뛰어난 연투 능력과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보인 최동원이 야구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도 그에 비견되는 훌륭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수협 사태 등으로 프로야구계에서 거의 추방되었다가, 이글스의 투수 코치로 가까스로 다시 야구장에 돌아온 최동원과 고향팀을 떠나서 부산으로, 현재는 홈레스 구단의 감독을 하고 있는 김시진, 지도자로서는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한 김용남은 선동열이라는 이름에 가려서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

서울산 삼총사와 달타냥

1991년의 고교야구에서는 메이저리그 붐을 일으킨 박찬호를 비롯해서 뛰어난 투수 재목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지금이야 박찬호선수가 선두주자이지만, 당시에는 휘문고의 임선동과 신일고의 조성민, 경기고의 손경수라는 서울산 빅3가 언론과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빅3 외에도 광주일고의 박재홍, 경남상고의 차명주와 곽재성, 마산고의 최창양, 프로에 직행해서 에이스 역활을 수행했던 대전고의 정민철, 부산고의 염종석 등이 동창생들이었다.

휘문고의 임선동은 리틀 야구 때부터 소문난 선수였다. 휘문중 시절 중학 야구를 평정하던 그는 세계 리틀 야구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MVP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교야구에 데뷔하던 1989년에는 봉황기의 결승전에서 당시 3학년이었던 유택현을 구원해서 동산고의 위재영을 상대로 빛나는 피칭을 보이면서 그의 이름 섯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당시 서울을 연고로 한 LG 트윈스와 OB 베어스는 빅3 중에 넘버원으로 평가되던 임선동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팀의 스카우터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주사위 던지기에 열중하였다. 주사위 던지기에서 유독 강했던 LG - OB가 이긴 적은 박노준(당시 MBC는 김건우)과 89년에 이진(MBC는 김기범) - 가 징크스대로 임선동을 차지하고, 예상 외로 OB는 손경수를 1차지명 선수로 선택하였다. OB가 조성민이 아닌 손경수를 낙점한 것은 손경수가 가진 무한한 잠재력과 함께 이미 손경수가 LG와 가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서울의 라이벌 구단인 LG에게 유망주 2명을 동시에 뺏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양 구단으로부터 지명받지 못한 조성민은 고려대로, 계약금 문제로 임선동은 연세대로, 손경수도 홍익대에 진학하였고, 모처럼 서울에서 배출된 대형 투수들을 한 명도 영입하지 못한 LG와 OB는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조성민은 고려대에 진학해서 이상훈이 졸업한 후에 실질적인 에이스로서 활약하면서 왜 그가 빅3 중의 한 명이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교와 대학에서 계속된 무리한 투구로 인해 3학년 때에는 어깨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손민한이라는 거물 신입생이 들어와서 선발보다는 구원 투수로 활약하면서, 여전히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노모의 투구폼을 흉내낸 옥에 티만 빼면 ...). 사실 손민한이 프로에 입단한 초반에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남기지 못한 것도 고교에 이어서 대학에서도 1학년때부터 혹사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실력을 꽃 피우지도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선수들은 대부분 기성 세대 - 감독들과 학교의 욕심과 그들의 명예의 희생양이었다.

어쨌던 1994년에 박찬호의 충격적인 메이저리그행을 지켜 본 조성민은 일본의 요미우리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요미우리에 입단한 그를 한국에서는 즉시전력감이라고 과대포장하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2군에서 착실히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1997년에 성공적으로 1군에 정착한 그는 1998년에는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그 전까지 요미우리를 대표하던 마키하라와 사이토 등을 대신해서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한 선수가 조성민이었다. 전국구인 요미우리의 프리미엄과 잘 생긴 외모와 무너진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던 조성민은 일본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7승으로 다승 1위이던 조성민은 올스타전에도 참가하였지만, 호사다마란 말처럼 이 올스타전이 그의 야구 인생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올스타전에서 단 1이닝을 던진 조성민은 팔꿈치 이상을 느꼈고, 결국 그대로 시즌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2군에서 재활 중이던 그에 대해서 별로 야구할 생각이 없다던지 야구가 아닌 연예계 진출을 도모하고 있다 등의 말들이 솔솔 풍겨나오던 2000년 12월에 당시 전성기는 지났지만 톱 탤렌트이던 C와 결혼을 하였다. 이전부터 요미우리는 조성민에게 야구에 전념하라는 메세지를 보냈지만, 부상의 정도가 심했는지 2001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끊이지 않고 제기되던 조성민 부부의 불화설은 2002년 12월 그의 기자회견을 신호탄으로 해서 수면 위로 불거져 나왔다. 누가 잘했나라는 문제를 떠나서 폭행 등과 관련된 구설수로 인해 한국 프로야구에서 재기를 꿈꾸던 조성민에게는 큰 오점이 되었다. 재기를 노리던 조성민은 2004년과 2005년에 연거푸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하였고, 복잡한 사생활과 실전에 투입될 수 없는 몸상태 등으로 인해 한때 일본을 거쳐서 메이저리그를 정조준했던 그의 야구인생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예상되었다.

타고난 재능을 사생활로 인해 살리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 선수가 조성민이었다. 분명히 그의 부상은 엘리트 스포츠의 결과물이었지만, 재능만을 믿고 노력을 게을리하는 등 그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어쨌던 천부적인 재능은 조성민에게는 역설적으로 게으름을 주어서 오히려 독이 된 셈이었다. 방송 해설가를 거쳐서 이글스에서 마지막 기회를 잡은 조성민은 불펜 투수로 부활의 날개짓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그가 어떠한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인지에 관심이 가지만, 쉽게 박수를 보낼 수 없는 것이 솔직한 개인적인 심정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풍운아

LG의 구애를 뿌리치고 연세대로 진학한 임선동은 문동환과 함께 팀을 대학 정상으로 이끌었다. 대학 4년 동안 임선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기생 중에서 넘버원이었는지를 실력으로 증명하였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조성민의 요미우리 입단을 지켜본 그는 후쿠오카 다이에행을 선언하였다. 결과적으로 일본 프로야구 진출을 도모하면서 한 때 선동열의 후계자라고 말해지던 그의 야구인생이 복잡하게 꼬였다.

임선동은 일본행을 원했지만, 1992년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권을 행사한 LG가 신인 지명권을 무기로 임선동의 행보에 급제동을 걸었다. 이에 임선동은 [지명권 효력정지 및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지리한 법정 다툼이 시작되었다. 신인 지명권은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비난 속에 법원은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신인지명제도는 헌법상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위반돼 무효]라면서 임선동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LG와 함께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제2의 임선동 사태를 막기 위한 타구단과 KBO의 공조 속에서 임선동은 일본행을 접고 LG에 입단할 수 밖에 없었다.

최동원 - 선동열의 계보를 이을 것이라고 말해진 임선동은 데뷔 첫해(1997년)에 11승 7패를 기록하였다. 명성에 걸맞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법정 다툼 등으로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알기에 충분한 성적이었다. 다음 시즌의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임선동은 LG에서 야구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태업으로 일관한 그는 고작 15게임에 출전해서 1승 6패와 거의 7점대에 가까운 방어율을 기록하였다.

결국, 임선동은 안병원과 현금 7억원에 트레이드되어서 자신이 원하던 유니콘스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지만, 야구 선수의 생명인 몸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까닭에 1999년에는 2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몸 만들기에 전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에는 18승 4패라는 성적을 올리는 등의 활약으로 역시 임선동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2001년에는 14승, 2002년에는 8승, 마침내 2003년에는 4경기에 나서서 승리 없이 2패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기록하였다. 2004년에도 2경기밖에 나서지 못하는 등 여전히 재기 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임선동의 부진은 대학 졸업 후 1년간의 방황 속에 방치된 몸과 태업 등으로 제대로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투구한 후유증이 원인이 아닐지 싶다. 다시 한번 재기할 수 있을지 여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임선동이라는 이름은 한국 프로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고 생각한다.

프로 구단이라는 강자가 선수들을 노예로 묶어 두었던 노비문서 등에 혁신을 가져오게 된 것은 임선동의 대항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1999년에 불거진 선수협 파동에서 선수협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토대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임선동은 성적에서 최동원 - 선동열의 계보를 잇지는 못했지만, 야구 제도 측면에서는 최동원의 계보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라운드에서 쌩쌩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은 야구팬으로서는 진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야구판의 무전유죄

빅3 중에서 당시 실력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만, 잠재력 면에서는 최고라고 말해지던 손경수는 OB와 계약금 문제 등으로 홍익대에 진학하였다. 이 결정이 결과론적으로 앞으로의 그의 야구 인생을 깊은 늪으로 빠트렸다고 할 수 있었다.

1993년 12월 대학을 중퇴한 손경수는 헐값이라고 할 수 있는 5천만워에 OB 베어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손경수가 대학 중퇴라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프로에 들어간 것은 교통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손경수는 바로 프로에서 뛸 수는 없었다.

당시 프로 - 아마간의 협정서에는 [대학 선수가 중퇴했을 때는 대한야구협회와 합의하에 중퇴일로부터 만1년이 경과 후에, 그리고 불미스런 행위로 인하여 퇴학, 제적, 징계된 선수는 처분된 날로부터 만2년이 경과된 후에 프로구단과 입단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경수의 팀 이탈을 떨떠름하게 지켜보던 홍익대측은 손경수를 제적 처분하지 않았고, 대학 선수로 1994년에도 등록하였다.

OB로서는 전년도에 있었던 강혁을 둘러싼 앙금도 있었고, 잠재력이 높은 손경수를 2군에서 2년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편이 훨씬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였다. 계산대로 손경수가 2년 후에 에이스가 되고, 기존의 김경원(동대문상고 때에 보고 정말 매료된 선수였지만, 그도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한 정신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과 김상진, 권명철(정민태에 그늘에 가렸지만, 훌륭한 재목이었지만 쩝 ... 야구 알다가도 모를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느낌), 박상근(강원도 출신은 안경현 외에 이상하게도 프로에서 힘을 못 쓰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다. 이 선수도 좋은 체격조건에서 나오는 빠른 볼이 인상적이었는데, 어깨 부상으로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였다), 한태균(광영고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언더스로 투수로, 불펜진 등에서 제몫을 하기도 했지만), 홍우태(투타에 능한 선수로 홍포크로 불릴 만큼 포크볼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등이 기대대로 성장한다면 OB 베어스의 미래는 온통 장미빛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단의 바람과는 달리 손경수의 2군 생활은 순탄하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고 있던 박찬호가 국민적인 관심 속에서 그 누구도 밟아 보지 못한 메이저리그의 마운드에 잠시나마 서 있었고, 라이벌인 임선동과 조성민, 차명주 등이 날아다니는 소식을 들어면서 그는 심한 자괴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2군 생활은 끝을 알 수 없는 늪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2군에 있을 때에는 1군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포 자기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한 강박감을 느낀다. 연습생과 2군 신화를 이룬 장종훈과 송유석, 이동수 등이 있지만, 2군 다승왕을 한 김현욱이 그 해에 방출되었던 것처럼 1군에서 2군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지만, 2군에서 1군으로 승격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을 통과할 만큼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기약없는 2군 생활에 손경수는 자주 숙소를 이탈하고 술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선수에게 있어서 술은 독약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기분 좋아서 한잔하는 술은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지만, 절망감에 빠졌을 때에 마시는 술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 뿐이다. 끝내는 구단도 손경수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손경수는 재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간염으로 인해 1994년을 끝으로 야구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 손경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유니폼을 벗은 무명의 선수들이 육체 노동에 뛰어들었듯이 그도 육체 노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간염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혹은 다른 분야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임선동이 신인 지명권의 희생양이었다면, 손경수는 가난이 죄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1991년의 고교야구를 뜨겁게 달구었던 서울산 빅3는 현재 시점에서는 그들의 재능이 오히려 독이 되어서 그들의 미래를 망쳤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임선동과 조성민은 재기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티고 있지만, 삼총사는 사라지고 달타냥들만이 살아 남은 92학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손윤의 야리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LA Dodgers (4)  (0) 2006/08/23
잊을 수 없는 선수들 (36)  (4) 2006/08/22
잊을 수 없는 선수들 (35)  (4) 2006/08/18
에이전트는 두 얼굴의 사나이?  (4) 2006/08/17
Eye & Sports  (0) 2006/08/17
잊을 수 없는 선수들 (34)  (0) 2006/08/16



Posted by 손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