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가 올림픽의 종목이 된 것은 1984년 LA올림픽에서 시범경기로 채택되면서, 서울올림픽을 거쳐서 바로셀로나올림픽 때부터 정식종목이 되었습니다. 올림픽에는 목숨을 거는 한국스포츠의 특성에 군사정권의 유일한 자랑꺼리로 귀에 귀딱지가 앉도록 들은 서울올림픽을 위해서 야구도 다년간 국가대표에서 주력으로 활약한 선수들을 1년간 보류선수로 묶어두는 등 총력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당연히 금메달이 아니면 메달도 아닌 한국이기에, 게다가 청와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우승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야구의 절대지존인 쿠바가 불참했기에 한국이 우승할 것이라고 찌라시들은 연일 나팔을 불었습니다.
초호화판 캐스팅이라고 자화자찬을 하면서 대박을 노렸던 한국대표팀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서 푸에르토리코에게도 완패를 당하면서 4위라는 쪽박을 찼습니다. 당시 미국은 LA올림픽에서의 일본에게 당한 충격적인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자가 대거 포진된 최강의 전력이었습니다. 로빈 벤추라, 찰스 내기, 앤디 베네스, 티노 마르티네스, 탐 굿윈, 벤 맥도날드 등 프로에서도 이름을 날린 선수들 속에서 미국팀의 에이스는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완투승을 차지한 짐 애보트였습니다.
100% 희망이 없어질 때까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장애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하나의 단순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올림픽에서 짐 애보트는 신체적 특징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오른손은 흔히들 말하는 조막손으로 손목 이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짐 애보트는 1967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기생커플의 첫번째 아이로 미시간주의 자동차산업으로 유명한 플린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애보트의 부모로서는 자신의 아이가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보트의 부모는 애보트를 키우면서 중고차 판매원 등으로 생활비를 벌면서 둘 다 미시건대학을 졸업하였고, 어머니는 로스쿨을 거쳐서 교육법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체적 핸디갭으로 인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애보트의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꾸기 위해서 애보트의 아버지는 애보트와 캐치볼을 시작하였고, 이것이 애보트가 야구와 처음으로 만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애보트는 왼손으로 던진 후에 오른 팔에 끼운 글러브를 왼손으로 체인지해서 볼을 잡은 후에 다시 볼을 잡은 글러브를 왼손에 끼우고 그 공을 잡아서 던지는 [애보트 스위치]라고 불리게 되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핸디갭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애보트는 아버지와의 캐치볼을 거쳐서 리틀야구단의 일원이 되었고, 또한 자신의 신체적 핸디갭으로 인해 마운드에 서기를 주저하는 애보트를 격려하면서 마운드에 올려보낸 감독과 야구부의 동료로서 받아들여준 친구들 등의 응원 속에 애보트는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빠른 공을 던지는 애보트를 공략하기 위해서 상대 팀 감독들은 애보트의 신체적 약점에 주목해서 번트작전을 빈번히 사용하였고, 이러한 번트작전 속에서 [애보트 스위치]는 더욱 더 능수능란하게 되었고, 여러가지 어려운 경험 속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점점 야구에 재미를 붙인 애보트는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어했고, 그의 꿈을 들은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메이저리그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다]고 그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메이저리거를 향한 애보트의 꿈은 고교를 졸업할 때에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애보트는 1985년 드래프트에서 토론토로부터 36라운드라는 하위라운드이지만, 지명을 받았습니다. 메이저리그가 현실로 다가왔지만, 애보트와 그의 부모는 냉정하게 판단하였습니다. 아직 메이저리거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애보트가 프로에 갈 경우 단순한 구경꺼리로 전락할 수 있기에, 프로의 유혹을 뿌리치고 미시건대학으로 진학하였습니다.
최고 구속 150km를 넘는 강속구를 앞세워서 애보트는 대학무대를 평정하면서, 1987년에는 최고의 아마추어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 스파이크상을 수상하는 등 대학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가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88년 드래프트에서 캘리포니아 엔젤스(현 애너하임)로부터 1라운드(전체 8순위) 지명을 받았고, 또한 미국대표팀의 에이스로서 서울올림픽에 출전하였습니다. 결승에서 난적 일본을 꺽고 금메달을 목에 건 애보트는 엔젤스에 입단하였고, 엔젤스는 애보트를 메이저리그 역사상 16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시켰습니다.
짐 애보트가 메이저리그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정정당당한 승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상대한 팀들은 그의 신체적 약점을 끊임없이 파고들었습니다. 9명의 타자가 연속해서 번트로 공략하거나 포수가 애보트에게 공을 줄 때 토스하듯이 주는 틈을 타서 홈스틸을 시도하는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애보트를 공략하였습니다. 그 공격을 갖은 시행착오 끝에 이겼냈기에 애보트는 메이저리그행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짐 애보트를 메이저리그에 서게 한 것은 그의 노력과 주위의 응원 외에도 특별대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많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러운 분들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그들만의 리그로 한정시키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사회낙오자로 만드는 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애보트의 메이저리그 직행에 대해서도 뒷말들이 많았습니다. 1994년 박찬호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직행할 수 있었던 것은 LA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있었듯이 전국적인 주목은 커녕 흥행에서 참패를 면하지 못하고 있던 엔젤스구단이 홍보를 위해 애보트를 이용한다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어쨋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애보트는 자신의 실력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29경기에 전부 선발로 등판해서 12승 12패 방어율 3.92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아메리칸리그 신인왕후보에도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1990년에도 10승에 턱걸이하면서 2년연속 두자리수 승리투수가 된 애보트는 1991년 18승 11패 방어율 2.89를 기록하면서 척 핀리, 마크 랭스턴과 함께 엔젤스의 좌완 3총사로서 맹활약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7승 15패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방어율은 오히려 전년도보다 낮은 2.77을 기록하였습니다. 승수가 적은 것은 3할과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가 한명도 없을만큼 무기력한 엔젤스의 타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4년간 활동하였기에 연봉조정신청자격을 취득한 짐 애보트는 구단과의 이견으로 연봉조정신청위원회까지 가는 진통끝에 승리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금액(235만달러)을 받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단이 자신을 저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애보트는 팀에 대한 실망감으로 트레이드를 요구하였습니다. 끝내는 J. T. 스노우 등이 포함된 1:3트레이드로 양아치들의 유니폼을 입고 1993년 시즌을 맞이하였습니다.
양아치의 일원이 된 애보트는 1993년 9월 4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생애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엔젤스에 있을 때처럼의 강렬함은 보이지 못했습니다. 이적 첫해에는 11승을 거두면서 치면치레는 했지만, 1994년에는 9승에 머물렀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에 FA자격을 얻은 짐 애보트는 극성스러운 뉴욕을 떠나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하였습니다. 짐 애보트의 하얀 양말을 신고 17경기에 나서서 6승 4패를 기록하였지만, 시즌 중에 트레이드되어서 다시 한번 천사표 날개를 몸에 부착하였습니다. 2팀에서 11승 8패 방어율 3.70을 기록하면서 애보트는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부활이 기대되었던 1996년이었지만, 2승 18패를 기록하는 등 최악의 한해를 보냈고, 구단명도 1996년을 끝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애너하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절치부심하면서 명예회복이 기대되었던 1997년에는 스프링캠프에서 하세가와 시게토시에게 밀리면서 메이저리그 탈락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한 때 은퇴도 생각했지만 통산 80승을 거두고 있던 애보트는 세자리 승수인 100승을 채우고 싶었기에 독립리그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메이저리그의 초대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1998년 5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부름을 받고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에 복귀해서 5승을 기록하였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아메리칸리그를 떠나서 밀워키 브루워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내셔널리그에 갔지만, 기대와는 달리 2승 8패 방어율 6.91을 기록하였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에 밀워키에서도 방출된 애보트는 재기를 노렸지만, 더 이상 자신의 구위가 통하지 않음을 느끼고 100승에 대한 아쉬움 속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짐 애보트의 메이저리그 통산성적
통산 263경기에 등판해서 87승 108패 888탈삼진 방어율 4.25를 남겼습니다. [결코 대단한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자기자신은 메이저리거로서 보낸 10년간에) 만족한다]는 말처럼 그의 메이저리그에서의 성적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거나 하나의 개인타이틀을 딴 적도 없지만, 그의 존재 자체로 용기를 얻었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누구보다도 화려한 선수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장애여성 이전에 성적욕망 가진 여자예요]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 어떤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모임의 일원 중에는 A가 있었는데, A는 지역의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자유스러운 분들의 생활을 서포터하는 활동을 맡고 있었습니다.
A가 맡고 있는 분들 중에 B라고 병명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척추에 이상이 있어서 자신의 의지로 일어나거나 움직일 수 없는 분이 있었습니다. B라는 분을 우연스럽게 2, 3번정도 본 적이 있는데 좀 까탈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서포터하시는 분들이 고생 좀 하시겠다는 기억정도 밖에 제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A가 B를 전담하다시피 서포터하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일주일에 3번으로 줄어들었고, 다른 일 때문에 A가 더 이상 서포터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A와 함께 B를 분담해서 서포터하던 분들은 지역의 어머니회와 비슷한 모임의 자원봉사자였고, 후에 A를 대신해서 맡은 사람은 모임의 여성동지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A를 대신해서 서포터하던 여성동지를 B가 한달정도가 지났을 때부터 거부하기 시작했고,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바꾸어 달라고 모임에 요구하였습니다. 아마도 화장실이나 옷을 갈아 입거나 자신의 험한 몰골을 여성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수치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부터 모임내에서 다른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않는 B는 애인을 사귈 기회나 이성을 만날 기회조차도 거의 없었습니다. 자주 보는 이성이라고는 서포터해주는 사람들밖에 없었기에 처음에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마스터베이션으로 해소하였지만 - 신체적인 이유로 그 흔적조차 깔끔하게 뒷마무리할 수 없었지만, sex에 대한 욕구 자체가 해소되지는 않았습니다. sex에 대한 욕구를 B는 A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고, A는 나름대로 생각 끝에 소위 말하는 출장마사지걸 중에서 사전에 B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괜찮다고 하는 마사지걸을 불러서 B의 억제된 성욕구를 해소해 주었습니다. A가 마지막까지 B의 서포터에 집착했던 이유도 자신이 아니면 B의 성적인 고민을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캐서린 매키넌씨의 강연회 등을 계기로 내부적으로 성매매와 포르노 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성매매종사자를 성노동자로 보는 입장과 성매매 자체가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침해(파괴)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 등으로 갈려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A의 행위로 더욱 더 양쪽의 골이 깊어져서 모임은 분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A의 행위를 옹호하는 쪽이나 비판하던 쪽이나 그들로부터 개인적으로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몸도 시원찮은 주제에 sex라니 ....], 혹은 [꼴에 남자라고 .... 지저분하게시리 ....] 등이었습니다.
만약 B씨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어떤 만남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러운 사람은 sex도 부자유스러워야만 하는 것일까? 혹은 신체적으로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은 무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답은 저너머에라도 있을지 .... ....
'손윤의 야리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잊을 수 없는 선수들 (37) (0) | 2006/08/24 |
|---|---|
| LA Dodgers (4) (0) | 2006/08/23 |
| 잊을 수 없는 선수들 (36) (4) | 2006/08/22 |
| 잊을 수 없는 선수들 (35) (4) | 2006/08/18 |
| 에이전트는 두 얼굴의 사나이? (4) | 2006/08/17 |
| Eye & Sports (0) | 2006/08/17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