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비선수인들로 구성된 서울대 야구부가 199패 1무 끝에 공식전에서 1승을 거두면서 언론으로부터 많은 조명을 받았습니다. 야구는 실질적으로 고교, 아니면 중학교 때부터 준프로에 가까운 선수들의 경합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코시엔에 출전하기 위해서, 혹은 코시엔 예선에서 1승을 거두기 위해서 시골의 야구부가 노력하는 모습 등은 한국에서는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야구를 하고 싶으면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해야 하거나 대학 입학을 위해서 강한 팀으로 전학을 가거나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고교야구부 감독의 능력은 오로지 어떻게던지 우수한 선수를 끌어모아서 팀을 전국대회 4강에 올리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우수한 선수들을 받아들이는 대학은 그 선수 외에 덤으로(?) 야구부에 이름만 적힌 선수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전국대회 4강 때문에 심판 매수나 담합의 의혹도 끊이지 않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고교선수들을 놓고 한 때 대학이 프로를 이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쓴 빅3나 강혁 등의 경우처럼 대학이 프로를 돈으로 이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을 순수아마추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고교 교육 아래의 야구가 행해지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시스템 하에서는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야구기계만을 생산해 내는 지랄 같은 야구판입니다.
구라대왕 허구라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가장 친숙해진 사람들이 야구해설가입니다. KBS의 하일성씨와 MBC의 허구연씨는 대표적인 해설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구연씨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석사출신이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좋게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야구를 병행한 인물로, 나쁘게 보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를 야구판에서도 보는 느낌도 있습니다.
허구연은 경남고를 12년만에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시키면서 각광을 받았습니다. 청소년대표와 고려대학교에 진학해서는 국가대표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야구의 강타자였던 허구연은 졸업과 함께 한일은행에 입단해서 미사일타선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한일 실업경기에서 발목부상을 당하였습니다. 1978년 모실업팀(백호기 대회로 기억하지만, 대학팀과의 경기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과의 경기에 오랜 부상의 공백을 끝내고, 복귀해서 홈런을 치지만 여전히 발목은 정상이 아니었기에 은퇴를 결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프로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야구를 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그만두자라는 심리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공부에 대한 미련도 있어서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학위자가 되었을 때에,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출범하였습니다. 그리고, MBC의 해설가로서 동향의 명투수였던 김소식과 함께 MBC를 대표하는 해설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너무 일찍 은퇴했기 때문에 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선배와 동료들을 보면서 자신도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그런 허구연이 1985년 10월 삼미를 인수한 청보 핀토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라운드로 복귀를 하였습니다. 당시 35세로 최연소 프로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화려한 데뷔를 장식했지만, 프로의 세계는 TV화면 속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시즌 시작과 동시에 8연패 끝에 감독 데뷔 첫승을 신고하지만, 팀의 부진은 계속 되어서, 한국화장품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강태정이 감독대행이 되었던 5월 11일까지 8승 23패만을 기록하였습니다. 후반기에 다시 감독직에 복귀하지만, 성적은 기대대로 오르지 않았고, 다시 강태정씨가 감독대행이 되어서 팀을 이끌었습니다. 통산 성적 15승 2무 40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뒤로 하고, 고향팀인 롯데 자이언츠의 수석코치를 2년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화려한 선수생활과는 달리 감독 생활은 그에게 상처만을 남겼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경험 부족과 젊은 나이로 인한 팀 장악력의 부재, 그리고 약한 팀전력이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에서 연수를 끝낸 허구연은 정든 마이크 앞으로 복귀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혹은 프로야구가 일찍 출범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초창기 롯데를 대표한 김용희와 김용철의 이름에 그의 이름도 덧붙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1번의 기억
야구선수들의 백넘버를 보면 재미있는 경우로, 자신의 이름을 빗대서 [0번을 달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공필성의 0번과 오영일의 51번 등이 있습니다.
오영일은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의 우승멤버로서 1983년 MBC에 입단하였습니다. 입단 첫해에 10승을 거두었고, 팀의 바램대로 특급에이스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선발투수로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의 고교시절에는 당시 박철영이라는 초 특급포수가 있었지만, 전국대회에서 뚜렷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에, 자신은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감독은 다른 선수 4명인가 5명을 받아준다는 조건으로 모실업팀 입단을 종용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끼워팔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오영일은 감독의 처사에 반발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인하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오영일에게 실업팀 입단을 종용한 감독은 어떻게 보면 당시에는 일반적인 형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야구밖에 모르는 동기생들의 미래가 오영일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벼랑 끝으로 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당연함을 생각하면, 이미 엘리트스포츠의 폐해는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선수를 꿈꾸는 전국의 모든 고교나 중학생들이 모두 다 프로의 유니폼을 입을 수 없고, 1군 무대에서 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야구를 할 수 있는 선수도 한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학원스포츠는 어린 학생들의 직업의 자유를 박탈하는 면들이 많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운용상에 문제 등에 의해서 완벽한 제도는 있을 수 없지만, 지금의 제도는 비리와 부정을 낳을 수 밖에 없는 기형적인 제도입니다.
예전에 전국대회가 열릴 경우 전국에서 올라 온 야구팀이 심판들이 머무르는 여관 근처에 숙소를 잡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심판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단순히 사명감이나 명예만으로 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적지상주의와 열악한 심판의 상황 등이 판정을 둘러싼 잡음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스포츠는 전국대회 4강에, 프로스포츠는 우승에 눈이 멀어서 더 이상 스포츠가 아닌 부정과 부폐의 산실이 되고 있습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에는 야구붐이 일어서 동네 공터마다 야구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터도 없고 야구를 할 수 있는 인원을 채울 수 없어서 동네야구는 과거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야구는 야구기계로 생산된 야구선수들만의 것으로 팬들은 돈을 내고 기계들의 활약상을 보는 입장입니다.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검투사들의 모습이 야구장에 투영되는 것 같아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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