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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찰리 신과 톰 베린저 등이 나오는 [메이저리그]가 있습니다. 영화 [메이저리그]는 만년 하위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부임한 새 구단주가 연고지를 이전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에서 끌어모은 오합지졸들이 펼치는 한판의 야구역전극입니다. 역전극을 펼치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실재로 존재하는 팀으로 영화 [메이저리그]처럼 오랜 침체기를 거쳐서 1995년부터 5년 연속으로 중부지구에서 우승을 차지한 강자로 군림하였지만, 번번히 월드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하였습니다. 당시의 멤버들을 생각하면, 정말 인삼깍두기에 산삼나물이라는 말밖에는, 그리고 이런 멤버로 우승반지를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정말 불운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인디언밥을 찾아서

클리블랜드를 연고지로 한 최초의 프로구단은 1879년 창단된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였습니다. 스파이더스는 1882년 갓 창설된 아메리칸어소시에이션으로 리그를 바꾸기도 했지만, 1889년 내셔널리그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 1890년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사이 영을 영입하였지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던 스파이더스가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 것은 구단의 물주들이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인수하면서 스파이더스의 주력선수들을 빼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이 영을 비롯한 주력선수들을 졸지에 잃어버린 스파이더스는 1899년 시즌에서 20승 134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기고 리그에서 퇴출당하였습니다.

무주공산인 클리블랜드를 다시 야구판으로 불러낸 것은 1900년 내셔널리그에 대항한 아메리칸리그의 창립이었습니다. 아메리칸리그소속으로 1901년 시즌부터 참가해서 꼴찌를 가까스로 벗어난 성적을 거두었던 클리블랜드를 살린 것은 당시 최고의 스타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에서 1901년 타율 0.426, 14홈런, 125타점으로 타격 3관왕에 올랐던 나폴레옹 라조이를 거저 주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조이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당시 내셔널리그는 독점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최고 연봉 상한선과 보류조항 등으로 선수들을 노예화하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칸리그가 기존의 내셔널리그에 대항해서 창립함에 따라서 아메리칸리그의 구단들은 후발주자로서 공격적인 경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흥행을 좌우할 수 있는 선수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였기에 스타선수들에게 내셔널리그보다 높은 연봉을 미끼로 유혹하였습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라이벌이었던 에드 델라한티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개하고 있던 라조이가 같은 지역의 아메리칸리그의 어슬레틱스로 이적하였고, 스카우트분쟁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필리스와 어슬레틱스는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였습니다(한국에서는 프로축구에서 꽤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종부나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던 노인우도 지리한 법정공방으로 선수생명에 치명상을 입어면서 사라져버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 리그의 자존심과 필라델피아에서의 생존을 놓고 벌인 법정공방 끝에 펜실베니아주법원은 라조이를 펜실베니아주 내에서 야구를 못하도록 하였고, 어쩔 수 없이 어슬레틱스는 리그 회장인 벤 존슨의 제안대로 그를 클리블랜드로 이적시켰습니다.

최고 슈퍼스타의 이적에 클리블랜드의 팬들은 열광하였고, 라조이는 성적으로 보답하였습니다. 라조이는 1903년과 1904년 2년연속 타격왕을 차지하였고, 1905년부터는 감독겸 선수로서 클리블랜드의 얼굴로서 활약하였습니다. 구단도 나폴레옹 라조이의 이름을 따서 냅스로 명칭을 변경할 정도로 라조이의 클리블랜드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11년에는 후에 블랙삭스스캔들로 야구계에서 추방된 조 잭슨이 젊은 피로서 수혈되기도 했지만, 우승과는 여전히 인연이 없었습니다.

1914년을 끝으로 라조이가 어슬레틱스로 이적함에 따라서 나폴레옹 라조이가 없는 냅스는 좀 생뚱맞기 때문에 팀 명칭을 공모하였고, 일찍이 스파이더스에서 활약하였던 인디언인 루이스 소칼레식스를 기념하는 인디언스로 변경하였습니다.


1916년 트리스 스피커가 보스톤에서 트레이드로 영입되면서 팀성적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1918년과 1919년 2년연속 2위를 차지하면서 들러리가 아닌 주인공이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렸습니다. 1919년 시즌 도중에 감독겸 선수가 된 스피커를 중심으로 뭉친 인디언스는 1920년 시즌 초반부터 선두를 유지하면서 염원의 첫우승을 향해 질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8월 16일 양아치들과의 경기에서 칼 메이스의 투구에 주전유격수였던 래이 채프맨이 얼굴을 맞고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12시간 후에 채프맨은 더 이상 야구장에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지만, 선수들은 하나가 되어서 챔프맨의 영전에 첫우승을 바칠 수 있기를 기원하였고, 또한 운 좋게도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화이트삭스가 블랙삭스스캔들로 주력선수들이 퇴출되었기에 화이트삭스와 양아치들을 누르고 창단 이래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인디언스는 리그우승의 여세를 몰아서 월드시리즈에서는 브룩클린 로빈스(현 LA 다저스)를 5승 2패로 꺽고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인디언스는 1920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 몇번의 2위는 했지만, 중하위권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인디언스가 다시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영화 [메이저리그]에서 찰리 신이 배역을 맡았던 릭키 본의 모델로 생각되는 밥 펠러가 세상에 소개된 이후였습니다.

촌놈 세상을 셧아웃시키다

영원한 인디언스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손에 꼽히는 강속구와 슬라이더 등으로 타자들을 무기력하게 돌려세웠던 밥 펠러는 1918년 아이오와주의 반메터라는 깡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영화 [꿈의 구장]처럼 옥수수밭을 밀어버리고 야구장을 만들만큼 열광적인 야구팬이었기에 펠러도 자연스럽게 야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은 당시 가장 유망한 직종이었던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유격수였지만 강한 어깨를 가진 펠러는 17세 때에 뒤늦게 투수로 전향했지만, 지역의 세미프로팀을 상대로 노히트노런과 20탈삼진 이상을 기록하는 등 연일 호투를 하였습니다. 펠러에 대한 소문은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터들의 귀에도 들어갔고, 마침내 인디언스와 단 돈 1달러에 계약을 맺으면서 시골소년 메이저리그 성공기는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고교생과의 계약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인디언스는 일단 펠러를 마이너리그에 두고 상황을 볼 생각이었지만, 인디언스의 꼼수는 금방 발각되어서 다른 구단들로부터 계약위반이라는 말이 터져나왔습니다. 펠러와의 계약이 세상에 드러난 이상 클리블랜드는 이판사판으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매년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단상황을 생각해서 예외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생떼를 부렸습니다. 갑론을박 끝에 사무국은 클리블랜드가 다른 구단에게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선에서 서둘러 봉합하였고, 밥 펠러는 인디언스의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밥 펠러가 사람들에게 첫선을 보인 것은 1936년 올스타전 휴식기에 벌어진 세인트루이스 카지널스와의 시범경기였습니다. 밥 펠러는 인디언스입단에 따른 논란 등으로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학생투수로서 전국에 알려졌기에 시범경기인데도 불구하고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꽉찬 야구장에 4회말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펠러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강속구로 3이닝을 던지면서 8탈삼진을 뺏는 등 세인트루이스의 강타선을 완전히 KO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데뷔전이었던 8월 23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15탈삼진 완투승을 기록하였고, 9월 13일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와의 경기에서는 당시 메이저리그 타이기록인 17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밥 펠러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제구력난조라는 옥의 티는 있었지만, 펠러는 시즌이 끝났을 때에 5승 3패 방어율 3.34를 기록하면서 미완의 대기로서 인디언스의 미래다운 첫시즌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37년에도 학교를 오가면서 9승을 올린 펠러는 1938년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팀의 선발로테이션에 가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에 밥 펠러는 39경기에 등판해서 17승 11패 방어율 4.08과 함께 24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면서 탈삼진왕에 등극하였습니다. 디트로이트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1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면서 한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그의 강속구 앞에서는 타자들은 무기력한 존재였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깨지지 않는 한시즌 최다 사사구인 208 사사구에서 알 수 있듯이 심하게 말해서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강속구는 흉기 그 자체였습니다.

1939년 시즌에는 밥 펠러의 제구력이 향상(142사사구)되면서 리그 최정상급의 투수로 성장하였습니다. 타자로서는 24승 9패 방어율 2.85 246탈삼진으로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한 펠러의 강속구를 어떻게 맞출 것인가만이 문제였습니다. 팀의 확실한 에이스로 성장한 펠러를 1940년 4월 16일 화이트삭스와의 시즌 개막전투수로 기용하였습니다. 마운드에 오른 펠러는 8탈삼진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한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면서 자신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밥 펠러는 27승 11패 방어율 2.61, 261탈삼진으로 투수부분 3관왕(다승, 방어율, 탈삼진)을 차지하였습니다. 펠러의 빛나는 성적을 앞세워서 인디언스는 타이거스와 양아치들과의 치열한 리그우승경쟁을 벌였지만, 행크 그린버그와 보보 뉴섬 등이 투타에서 분전한 타이거스에게 1게임차로 밀려서 아쉽게도 2위에 머물렀습니다.


1941년에도 25승 13패 방어율 3.15, 260탈삼진으로 3년연속 최다승과 4년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하였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사사구의 숫자가 다시 상승(194사사구)하면서 타자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메이저리그 데뷔 6년만에 밥 펠러는 100승(107승)과 1000탈삼진(1233탈삼진)을 가볍게 통과하였습니다. 이제 전성기가 시작되는 밥 펠러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제구력의 난조도 아닌 타자들의 방망이도 아닌 시대가 그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밥 펠러는 1942년부터 거의 4년의 공백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5년 시즌 종반에 밥 펠러는 살아서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었습니다. 양아치들과의 메이저리그 복귀전에서 12탈삼진을 뺏어면서 2실점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시즌 막바지에 합류한 관계로 최종적으로 5승 3패에 그쳤지만, 오랜 공백을 느낄 수 없는 투구였습니다. 밥 펠러를 거의 4년에 가까운 공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력적인 투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주무기에 있었습니다. 밥 펠러는 그전까지 구사하던 강속구와 커브에 덧붙여서 슬라이더를 장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때는 밥 펠러가 슬라이더의 원조(지금은 1920년대에 활약한 조지 얼이 원조라는 설 등이 있다)라고 말해졌을 만큼 강속구와 함께 슬라이더는 밥 펠러의 상징이었습니다.

1946년 시즌에서도 밥 펠러의 강속구와 슬라이더는 진가를 발휘해서 26승 15패 방어율 2.18, 348탈삼진을 기록하면서 다시 최다승과 탈삼진왕에 올랐습니다. 게다가 4월 30일 양아치들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2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기도 하였습니다. 1947년에도 20승 11패 방어율 2.68, 196탈삼진으로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흥행의 귀재 빌 빅의 구단인수(1946년)와 세계철강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클리블랜드의 지역경제 상황 등으로 인디언스는 강팀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전력 상승으로 기대되었던 1948년 인디언스는 에이스 밥 펠러(19승)와 리그 정상급으로 성장한 밥 레몬(20승), 신예 진 비어든(20승) 등의 마운드와 감독겸 선수 루 부드로, 래리 도비 등의 방망이가 대분발하면서 어슬레틱스, 레드삭스, 양아치들과의 치열한 수위경쟁을 벌렸습니다. 니그로리그의 영웅 사첼 페이지가 시즌 종반에 보강되는 등 인디언스는 2번째 리그우승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길고 긴 피 말리는 페넌트레이스가 종료했을 때에 인디언스는 보스톤과 96승 58패로 공동 1위를 차지하였기에 리그우승을 놓고 피할 수 없는 보스톤과 1위결정전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스톤과의 1위 결정전에서 루 부드로가 홈런 2개를 포함한 4타수 4안타를 휘두르면서 가볍게 보스톤에 8:3으로 누르면서 2번째 리그우승과 함께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였습니다. 자니 세인과 워렌 스판이라는 좌우펀치를 앞세운 보스톤 브레이브스(현 애틀란타)와의 월드시리즈에서 밥 펠러는 팀타율 2할도 안되는 물방이 탓도 있어서 2패를 기록하였지만, 2승을 거둔 레몬의 활약 등으로 클리블랜드는 브레이브스를 4승 2패로 물리치고 2번째 시리즈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밥 펠러도 오랫동안 지켜온 인디언스의 에이스자리를 밥 레몬에게 바톤터치하고 주연에서 조연으로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겁없는 신예들인 마이크 가르시아와 얼리 윈 등을 생각하면 조연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15승(1949년)과 16승(1950년)을 거두면서 자신의 역활을 묵묵히 수행하던 밥 펠러는 1951년 22승 8패로 자신의 5번째 다승왕을 차지하였고, 7월 1일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에러로 1실점하면서 노히트노런에는 실패하였지만 3번째 노히트게임을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1951년을 마지막으로 체력저하와 계속된 혹사 등으로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면서 1952년에는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출전한 이래로 처음으로 한자리 승수(9승)를 기록하였고 1953년에는 10승에 그치면서 점점 밥 펠러가 유니폼을 벗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팀이 3번째로 리그우승을 차지한 1954년에는 13승을 거두었지만,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는 출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벤치에서 인디언스가 자이언츠에게 4연패하는 모습을 그냥 물끄러미 쳐다 볼 수밖에 없었던 밥 펠러. 수 많은 강타자들을 강속구와 슬라이더로서 돌려세웠던 화려한 날은 더 이상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밥 펠러는 1956년 4패를 마지막으로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인디언스는 밥 펠러가 달았던 19번을 영구결번시켰고, 1962년 투수로서는 빅 트레인 월터 존슨에 이어서 2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밥 펠러의 메이저리그 통산성적

영화 [메이저리그]의 릭키 본의 미래는 [슈퍼스타 감사용]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박철순이나 최동원이나 이만수, 김성한 등은 1등이라고 생각하지만 ... 어차피 얼마나 그 자리에 더 남아있었는가의 차이만 존재할 뿐 ... 그라운드에는 1등도 2등도 ... 꼴찌도 결국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벼랑 끝에 매달려서 인디언밥을 그냥 먹어나 우유에 말아 먹어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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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손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