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LA 다저스는 박찬호가 소속되어 있어서 한국프로야구의 제9구단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구단주가 바뀌면서 공격적인 경영(?)으로 팜은 황폐화되면서 퇴물들의 잔치가 벌어지는 구단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원래 LA 다저스는 자신들의 팜을 가꾸어서 신인들을 육성하고 발굴해 온 팀이었습니다.
1992년 에릭 캐로스를 시작으로 1993년 마이크 피아자, 1994년에는 라울 몬데시, 1995년에는 일본프로야구출신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노모 히데오, 그리고 1996년에는 토드 홀랜스워스까지 5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하였습니다.
엔젤 페냐와 폴 로두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포수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크 피아자가 지키던 다저스의 홈 플래트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오말리가에서 FOX의 머독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면서부터였습니다. 1988년 시즌 도중에 다저스는 마이크 피아자와 토드 질이 포함된 트레이드를 전격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마이크 피아자 대신에 찰스 존슨이라는 당시 최고의 수비형 포수를 영입했지만, 당시 다저스의 팜에서는 2명의 유망주가 메이저리그로의 승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최희섭과 트레이드된 폴 로두카와 한화에서 올해 용병으로 잠깐 활약했던 엔젤 페냐는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키면서 메이저리그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저스는 1999년 시즌 중에 수비형 포수인 찰스 존스 대신에 공격형(?-이라기 보다는 실제로는 공갈포였던) 포수인 토드 헌들리를 선택하고, 그 백업으로 엔젤 페냐와 폴 로두카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다 기대에 못 밑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99, 2000년 시즌을 2할 초반의 타율만을 기록했을 뿐이었습니다. 특히 엔젤 페냐는 마이너리그 때부터 지적되어온 선구안 - LA 팜 출신들의 특징기도 하지만 - 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2001년 홈런 25개, 타율 0.320의 몬스터 시즌을 보낸 폴 로두카에게 LA의 포수자리는 돌아갔습니다. 박찬호 전담 포수로 익숙한 채드 쿨러트의 존재 등으로 엔젤 페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거쳐서 독립리그로 추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 로두카와 엔젤 페냐, 둘 다 마이너리그 시절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행 티켓을 손에 넣었지만, 기회를 살린 로두카와 그 반대의 페냐 ... 그 결과 로두카는 지금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포수 한명이 되었고, 페냐는 한국에서도 퇴출되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재능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이 야구인 것 같습니다.
태양을 보지 못한 해바라기
1983년 해태에는 두명의 포수가 새로 입단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 카프의 2군 선수출신인 김무종와 군산상고와 건국대 등에서 아마야구를 대표하던 공격형 포수 조종규가 신인으로 원년(82년)에 전체 4위의 성적과 선수난에 허득이던 해태 타이거즈에 가세하였습니다.
지금은 프로야구에서 심판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만, 조종규는 김우근과 함께 고교(군산상고), 대학(건국대)에서 최정상급의 불방망이를 휘둘렀던 공격형 포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아마추어 성적을 바탕으로 프로에 입성했지만, 운 나쁘게도 2군이지만 일본프로야구 출신의 김무종이 주동식과 함께 해태의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당시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종규로서는 김무종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해태의 우승신화 속에서 그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그 후에는 유승안과 장채근이라는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들의 입단 등으로 자신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84년 시즌 초반에 OB로 트레이드되었지만, OB에서도 대타 등으로 출전할 뿐 여전히 그라운드는 그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야구유니폼을 벗고 심판복을 입고 젊은 선수들과 호흡하고 있는 조종규. 어쩌면 그는 불운한 프로야구 선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행복한 야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4번의 슬픔
미국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영예는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기간 활약한 팀으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예는 영구결번일 것입니다. 한국프로야구도 20여년의 기간동안 몇명의 영구결번 선수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불사조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박철순의 21번,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였던 선동열의 18번, 오랜 기간 동안 마무리로 선발로 맹활약 했던 김용수의 41번 등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팬들의 성원에 의해서 이만수의 22번이 삼성의 영구결번으로 결정되었지만, 여전히 영구결번식은 치러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쨋든 영구결번은 선수와 구단, 그리고 팬을 이어주는 정신적인 상징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는?
22연승의 불사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등산 폭격기도 아닙니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는 전OB베어스의 포수였던 故김영신의 54번입니다.

故김영신 ... 그는 매우 뛰어난 포수였습니다. 수비력과 공격력을 겸비한 한국야구에서 보기 드문 존재였습니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는 공격형포수와 수비형포수만 존재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수를 겸비한 그에게 팬들과 구단의 기대는 상당히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故김영신은 김봉근과 함께 상문고를 이끈 초고교급선수로 각광을 받으면서 동국대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에서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킨 그는 기대를 한 몸에 받어면서 프로구단인 OB 베어스에 1차지명을 받았습니다. 김영신은 베어스의 유니폼을 입고, 1985년 시즌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OB에는 수비형 김경문과 공격형 조범현의 플래툰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기에, 故김영신은 이들 두 선수와 살아남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경쟁을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두 선수의 벽 사이에 故 김영신이 낄 틈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국가대표출신이 프로에서 주전을 차지하지 못할 경우 하나의 불명예로 취급되었고, 2군에 대한 인식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85년 한시즌을 2군에서 멍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1986년에라도 기회가 올리가 없었습니다.
오랜 야구생활에서 주인공으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자부심만이 가득했을 그에게 있어서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고, 게다가 2군생활은 죽음보다도 더 깊은 절망만을 안겨줬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의 故 김영신은 놀러 간 강에서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고냐 자살이냐라는 논란이 많았지만, 그를 죽인 범인은 바로 엘리트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야구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선수들. 유명 대학의 졸업장은 손에 넣었지만, 부모의 한자조차 쓸 줄 모르는 국가대표. 언제나 엘리트로 존재할 줄 알았던 그들이 주변인이 되었을 때의 충격, 그러한 충격을 이겨내고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지난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는 그런 나약한 사람들만을 생산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학교의 운동장에서 땀 흘리고 있을 젊은 선수들이 야구만을 위한 기계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을 앞세운 사람들의 자식이 유명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용병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엘리트 스포츠의 어둠. 그들이 야구기계로 용병으로 존재하지 않는 참다운 스포츠는 인간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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