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선수는 정말로 공부를 ‘못’ 할까?
배지헌의 Rubber게임 2012/01/29 14:46
야구가 없는 기나긴 겨울을 [하이킥 3: 짧은 다리의 역습]을 보는 낙으로 견디는 중이다. 박하선과 하선씨, 박선생님, 박샘 등 여러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시트콤이지만 가장 관심이 가는 캐릭터는 안종석(이종석)이다. 종석은 잘 나가는 교내 아이스하키 선수였다.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 진학이 유력했지만, 갑자기 집안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운동을 접고 수험생이 된다.
19년을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다가 갑자기 교실에 들어갔으니, 공부가 될 리 없다. 처음에는 자기가 왜 교실에 앉아 있어야 되는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3학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2학년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는다. 교과서에는 모르는 말 투성이다. 초등학생도 알 만한 기초 영단어를 몰라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수능을 보러 가서는 1교시만 보고 그냥 나와 버렸다. 동생인 수정은 항상 ‘스투피드’라고 놀린다. 같은 교실 후배들은 “저 선배 바보 아냐?”라고 수근댄다. 종석은 정말로 ‘스투피드’일까.
종석이 겪는 참혹한 수모를 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한국의 수많은 (전직) 야구 선수들이 처한 환경을 떠올렸다.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교실과는 홈플레이트에서 센터 스크린까지의 거리만큼 멀어진다. 공부할 새가 없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훈련해야 하고, 경기에 나가야 한다. 공부할 이유도 없다. 대부분 자신이(자녀가) 박찬호, 이승엽처럼 될 거라고 생각한다. 고액연봉을 받는 스타가 되려면 배트 한번이라도 더 휘둘러야 한다. 책을 펴는 건 시간낭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스스로가 스타 플레이어가 될 만한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걸. 더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오면 또 한 가지를 깨닫는다. 할 줄 아는 일이 야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수능을 보고 돌아온 날 종석이 흘린 눈물은, 이 땅의 (전직) 야구 선수들의 눈물이기도 하다.
야구 선수들은 스투피드가 아니다. 공부에는 단계가 있다. 여러 지식이 시간을 거치면서 계속 쌓이고, 다른 지식과 연결되어 가지를 뻗어나가면서 발전한다. 그 중간에 어느 단계라도 그냥 지나치면, 만회하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아이큐가 200인 유치원생도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번에 고등수학 문제를 풀 수는 없다. 대부분의 운동 선수들은, 그런 단계를 거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본인이 필요로 해도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다. 배우기를 원해도 배울 수 없게 된다. 나중엔 자신에게는 공부가 필요 없다고 ‘믿어 버리게’ 된다.
사실 야구는 머리가 나쁘면 할 수 없는 운동이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수싸움, 사인 교환, 순간적인 판단은 모두 몸이 아닌 머리가 한다. 타자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예상하고 0.4초 내에 판단해서 정확하게 받아친 뒤, 상대 수비수의 움직임과 송구 능력, 점수차와 뒷 타자 등을 순식간에 판단해서 1루에서 멈출지 2루까지 내달릴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갈지 후크 슬라이딩을 할지 판단한다. 투수와 포수는 경기 전 상대 타자들에 대한 데이터를 전부 외우고, 경기에 들어가서는 타자의 컨디션과 자세와 앞서 던진 공과 앞 타석의 결과와 현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재빠르게 볼을 배합한다. 수비수들은 우리편 투수의 주무기와 포수의 볼배합과 타자의 타구 방향과 바람의 세기와 주자 유무 등을 모두 계산해서 자리를 잡고 스타트를 끊는다. 모두 머리로 하는 일이다.
스포츠 심리학자들은 입을 모아 “야구는 몸이 아닌 머리가 한다”고 말한다. 육체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머리가 따라주지 않으면 무식하게 던지고 치는 ‘동작’일 뿐이다. 몸의 허우적거림이 아닌 ‘야구’를 하려면 머리가 좋아야, 그것도 아주 좋아야 한다. 탁월한 신체조건으로 온갖 주목을 받고 데뷔한 선수가 머리가 따라주지 못해서 일정 수준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야구 잘하는 선수들은, 다들 머리도 좋다. 단지 그 좋은 두뇌를, 영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푸는 쪽으로 발달시킬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혹은 그럴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이다.
그 증거가 서울대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잘 나타난다. 국내 아마와 프로의 야구 지도자이 등록해서 야구와 관련된 온갖 과목을 배운다. 야구 역사부터 스포츠 관련 법률, 야구 영어, 야구 심리학, 운동역학, 생리학, 영양학, 경영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미디어와 마케팅 등이 전부 다뤄진다. 프로팀 지도자 과정인 마스터 코스가 4주 동안 120시간. 결석 2번이면 퇴학에 필기 4개 과목 시험을 치러야 수료증이 나온다. 성적 미달일 경우에는 다음 학기에 재수강을 해야 한다. 평생 야구만 하던 야구인들 대상으로 한 교육 과정치고는, 꽤나 까다로운 코스다.
생전 공부라고는 안 하던 야구 지도자들이 잘 해낼 수 있을까. 베이스볼 아카데미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그걸 걱정했다. 나이 지긋한 감독님들 모아놓고 수업을 하면 잘 따라줄까, 대충대충 하는 사람이 나오지는 않을까, 시험 탈락자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알고 보니 기우였다. 다들 학구열에 불탔다. 강의 시간은 꽤나 진지했고, 야구를 놓고 진지하고 수준 높은 토론이 이뤄졌다. 야구팬이라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수강생들이 잠을 줄여가며 과제를 수행하고, 시험공부에 열을 올렸다. 하루에 수 백 번씩 배트를 휘두르던 노력과 열정, 집중력을 일단 공부를 위해 쏟아내기 시작하자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지난 1기 리더스 과정의 모든 수강생이 거뜬히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리더스 과정을 수강한 한 고교 감독은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본 건 처음이었다. 여러 선후배들과 교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평생 야구하면서도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웠다.”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한 관계자는 “야구인들에 대해 정말로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다들 열심히 하셔서 놀랐다. 프로에서 이름을 날리던 스타들이라 누구한테 배운다는 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데 막상 교육이 시작되니까 달랐다. 역시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느꼈다.”

